어딘가에서는 쓰이기를
어느덧 3월이다. 2025년이 되고도 2달을 꽉 채워 지났고 학생이었다면 새 학기가 시작할 3월이다. 이제 따뜻한 봄을 기대해야 할 시기겠지만 아직 날은 쌀쌀했다. 올해의 계획이랄 것도 없었지만 이런 3월이 마냥 달갑지 않다. 무엇이 크게 잘못된 것도 없지만 몸도 마음도 축축 처지는 날이 찾아오면 한없이 높은 층에 위치한 우리 집에서 내 몸이 끝없이 하강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해야 할 일들을 하다가 저축해 놓은 돈을 다 소진해 버리면 그냥 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서 이 세상을 떠나버리는 게 낫겠다는 어둑한 생각이 든다.
기대하다 실망하는 것도 싫증 나고, 놓지 못하는 미련도 싫고, 감정적으로 물리적으로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경계하는 것도 진저리가 난다. 욕심나는 것이라도 있다면 독한 마음을 먹고 달려들겠다만 점점 더 그런 것도 무용하다 느껴진다. 엄마가 먹으라고 챙겨준 사과가 냉장고에서 군데군데 멍이 들어있었다. 어릴 적 먹던 것들을 무시 못한다 느끼는 것이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사과였다. 단 것과는 영 멀고 먼 입맛을 가진 아빠였지만 과일을 입에 달고 사셨는데 그중에서도 사과를 가장 많이 드셨다. 그래서인지 혼자 산지가 십 년이 훨씬 넘은 지금임에도 나도 입이 심심할 때면 사과를 찾게 된다. 사과가 맛있다고 소문난 동네에서 살다 보니 그런가 싶기도 하다. 맛있는 사과를 먹기는 쉽지 않은데 바람 들지 않고 단단하고 윤기가 나면서도 씹었을 때 아삭하고 상큼한 단맛이 쭉 느껴지는 사과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나마 엄마가 맛있다고 한 사과는 믿을만했기에 본가에 가면 사과를 챙겨 오는데 그렇게 챙겨 온 사과도 제때 먹지 못하고 냉장고에 방치했더니 먹지 못할 무엇이 되어버렸다. 결국 깎아보지도 못한 사과 4개를 통째로 버렸다.
옷장을 열어젖히고 커다랗고 하얀 종이가방에 담긴 옷들을 몽땅 꺼내 바닥에 늘여놓았다. 날이 따뜻해지면 입어야지, 어딘가 놀러 갈 일이 생기면 입어야지, 예쁘게 꾸미고 싶은 날 입어야지, 살이 조금 더 빠지면 입어야지, 언제일지도 모를 날들을 기약하며 버리지 못한 옷들이 한가득이었다. 이런 옷이 있었는지조차 까먹은 채 자주 입는 옷들에 밀리고 밀려 종이가방 저 바닥에 깔린 옷들이었다. 어쩐지 한껏 예쁜 척하며 길을 걸을 날이 이래저래 짜부되어 세상밖을 나오지 못한 것 같아 속이 상했다. 알록달록한 치마며 이제 입기엔 유치해져 버린 패턴의 원피스며 은근 다양한 옷들을 가지고 있었다. 몇 번을 펼쳐보고 들었다 내려놨다 해보고는 지금껏 입지 않은 옷들은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옷은 입혀져야 의미가 있는 것을, 이렇게 이사 갈 때마다 들고 다닌다 해봤자 아무 쓸모없는 천쪼가리였다. 이렇게 솎아내고 나니 은근히 무게가 나갈 만큼 한 무더기가 되었다. 딱히 옷이 많은 편도 아닌데 봄날을 기다리며 꽁꽁 처박아둔 옷들이 꽤나 된 것이 신기했다. 이참에 몇 가지 물건들을 더 골라냈다. 종량제봉투가 조금씩 차올랐다. 옷들을 들었다 놨다 하다 보니 먼지가 풀썩풀썩 날렸다. 먼지가 쌓인 시간만큼, 언젠가 입으리라 기대했던 나의 작은 마음들이 곳곳에 묻어져 있었고 이를 쓱쓱 털어내니 마음이 조금 더 싸늘해졌다. 정말 버려야겠다 골라낸 옷들와 그득 찬 종량제 봉투를 들고 쓰레기장이 있는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양손 가득 쓰레기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일반쓰레기봉투를 던져버린 후 헌 옷수거함 앞에 섰다. 옷들을 하나씩 집어넣다 결국 원피스하나를 버리지 못하고 챙겼다. 대학생 때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선물 받은 원피스였다. 안 입게 된 지는 오래됐지만 선물 받던 때는 옷이 너무 마음에 들어 여름이면 지겹도록 입던 원피스였다. 그 원피스를 입으면 조금 더 예뻐진 기분에 신나게도 입었던 것 같다. 헌 옷수거함에 버리려니 그때의 소박하고 나를 예쁘게 봤던 기분까지 버려지는 거 같아 차마 버릴 수 없었다. 물건을 정리하고 나니 무언가 할 일을 한 것 같다. 아직 버려야 할 물건이 많을 것이지만 오늘은 이만치만 버리기로 했다. 조금 더 마음이 바래고 나면 또 그만큼 물건을 버릴 수 있겠지. 그렇게 마음도 소유한 것들도 하나씩 정리해 나가야 할 것 같다. 더 가볍게 더 후련하게 그렇게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