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전야기
조금은 긴 여행을 앞두고 마음이 바쁘다. 최대한 있는 것들은 그대로 두고 떠나려 하건만 그래도 같이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언질을 줘야 하고 할 일 리스트에는 내가 집을 비우는 동안 관리비가 자동이체되도록 오피스텔 관리센터에 연락하기가 추가되었다. 혹시 모르니 전 세입자가 세팅해 둔 채로 그대로 쓰고 있던 현관키 비밀번호도 바꾸어 놓어야겠다. 내가 우울하고 화가 나고 신나고 급할 때 가장 바쁘게 움직여 줬던 차는 한동안 방전상태가 될 것이라 생각하니, 돌아오게 되면 바로 차가 필요할 텐데 이걸 어쩌나. 지인에게 몇 주에 한 번씩 잠깐씩 남의 차로 드라이브 해볼 생각 없느냐 물어봐야 하나 괜스런 고민들이 든다.
퇴사를 한 직후 내 마음속은 아주 어릴 적 할머니, 할아버지 댁을 가기 위해 굽이굽이 산능선을 타던 안개 낀 산속보다도 더 뿌옇게 적셔져 있었다. 갑갑스러운 안갯속에 있다 보면 공기를 쉬는 건지 안개를 들이켜는 건지 모를 무거운 숨이 쉬어지고 그러다 보면 불안과 답답함이 머리를 채우고 넘쳐 손끝, 발끝까지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다시 회사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아니 돌아가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발버둥 치다 보니 어떤 안개는 걷혔고 어떤 안개는 하나, 둘 모여 이슬이 되는 모양새다. 요놈의 안개들을 어떻게 잘 합쳐서 또르르 굴려볼까 생각도 들고 이래저래 펼쳐진 일들 중에서 어떤 것들을 더 해볼까라고 선택지에서 골라볼 알량한 여유까지 생겼다.
퇴사 후 반년이 넘어가는 지금 시점에 월급쟁이 생활만 해봤던 나로서는 지금의 내가 대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힘들어보니 힘든 사람의 마음도 알고 더 끈끈한 마음도 생기고 헛스런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더욱 가려나가진 다. 본인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만 다가와 아닌 척 본인의 이익만 취하는 위선자나 온갖 계산과 효율이란 이름으로 상대를 재단하는 사람들이 더 싫어진다기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귀한 사람들인가를 더욱 느끼게 되는 나날들이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참으로 빛나는 것이다. 그 무엇보다 내가 어떻게 살것인가에 대한 생각들이 더욱 다듬어지는 시간이었으니 이 나름대로도 성장이었다. 설령 언젠가 어딘가에 취직을 하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그리 마음이 헛헛하진 않을 것 같다.
새로운 곳에서는 또 어떤 낯선 경험들이 날 놀라게 할 것인가. 걱정보단 기대가 더 크고 두려움보단 설렘이 조금씩 커져간다. 새로 도전할 것들을 생각하고, 시도해 보고, 배우는 것. 이 단순한 반복이 멈추지 않을 수 있도록 나를 더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나는 나일 수밖에 없기에 어쩌면 내가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기에. 따뜻한 말차라떼가 내게 주는 온도만큼 따뜻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