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셋과 가죽자켓.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는 보호막

by 연하

나 직업란에 무직이 좀 싫으니, 교육계 종사자로 체크해놓는다. fake는 아닌 거야.

왜? 5개월 후에 진짜 될 거니까.


헤드셋과 가죽자켓.

— 그것들은 세상의 소음을 차단함으로써 나를 보호한다.

짧은 치마와 크롭나시를 입어도 위에 헤드셋을 끼고 가죽자켓을 걸치고

무시로 일관하면 말을 걸다가도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떨어져 나간다.


말을 걸어도 하찮다는 표정 지으며 귀찮다는 듯 씹고

시선은 앞으로 고정하며 지나가면 되는 것이다.


성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을 반만 이해한 게 아닐까.

조금 더 선명한 해상도로 세상을 이해하면 여러 가지 장점이 많다.

그중 한 가지는 원하는 것을 조금 더 쉽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르바이트 면접을 갈 때조차도.


타인을 필요로 해 카페에 가지만 그곳에서도 너무 시끄러워지면

헤드셋을 끼고 소리를 최대로 키운다. 그렇게 하면 세상의 소음을 차단할 수 있다.


헤드셋을 산 건 출근길에 계속 애들이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니 계속 말을 걸어서

헤드셋을 샀다.


우리 반에는 애니 덕후가 있다. 걘 맨날 특이한 옷을 입고 오고, 앞머리도 엄청 기른다. 당연히 그냥 놔둔다. 그런 사소한 것들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 세상엔 다른 중요한 것이 많은데 머리색깔이든 치마길이나 화장 같은 걸로 뭐라고 하지 않는다. 중고딩 때 쌤들은 얼마나 할 일이 없었으면 그런 거나 잡고 있었을까. 세상엔 고쳐야 할 더 심각한 문제들이 더 많은데. 예를 들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전쟁이나 노동착취 같은 것들. 그것도 아니면 교사 본인의 인생에 대한. 욕먹을 때 먹더라도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는 걸 밀고 나갈 깡 정도는 있어야 한다.


*

락이나 힙합 아니면 내 정신을 대변할 노래가 없다. 이제 와서 백예린 초기 앨범이나 발라드를 들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런 것들은 날 취약하게 만들어. 과거로 돌아갈 수 없어.


사람들은 겉모습에 너무나 잘 속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사람들을 갖고 논다. 넌 세상이 만만하냐. 그래 만만하다. 세상에 너무 속고만 살았으니, 이제는 속일 차례다. 정당방위, 무죄다.


***

현재 남자친구를 유혹한 방법. 그와 나는 부산 록페스티벌에서 만났다. 흥분해서 같이 떼창 하다가. 그가 날 보고 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옷을 입고 편지를 쓰고, 말을 했다.

그는 나를 지성인이라 부른다.


예전에 날 거슬리게 한 그 여잔 이젠 별로 위협적이지 않다. 섹시하지 않아서 머리 안이. 화장을 안했다고 자신감이 없어질 정도면 얼마나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거야. 그런 안정되지 않은 정신상태론 자길 유혹할 수 없다는 거, 난 잘 알고 있거든. 난 성인이 되기 전부터, 무늬조차 없는 회색 트레이닝복 세트 안에서도 관능을 연구해온 여자라. 그런걸로 별로 위협을 느끼지 않거든. 알잖아 나. 내꺼 빼앗기는 거 못 견디는 거. 깨진 유리 붙잡고 손에 피흘려가면서까지 얻어내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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