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방비의 낮, 무방비의 나

2021

by 연하

여름은 낮이 길다. 오래 깨어있었던 것 같아도 여전히 낮이다. 굳이 무언가를 덮지 않아도 되는, 무방비의 상태. 얇은 천조각들로만 몸을 가리고,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는 천장을 바라본다.


“학교에서 배운 게 뭐가 있어, 우리가.”

정적을 깨며 말을 꺼낸 건 나였다.

룸메이트가 가볍게 웃었다. “음… 글쎄, 뭐가 있었더라.”

“솔직히 실용적인 건 없었던 것 같아. 근데 그런 말 있잖아.”

“뭐?”

“전공에 영향을 받는대. 그 사람을 보면 무슨 전공인지 느낌이 온대. 세계관이 바뀐대.”


‘음 난 좀 싫은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공부하러 간다.” 룸메이트는 방을 나갔다. 그 애의 책상에는 꽃이 거꾸로 말려져 있다. 남자친구가 선물로 준 꽃이다. 한 달 간격으로 꽃이 바뀌는데, 나는 꽃의 이름을 직접 물어보거나, 야생화 수업에서 배운 걸로 추측하거나, 어플로 사진을 찍어서 맞춰본다. 이번 달은 연분홍색 거베라이다. 복숭아빛이 도는 거베라였으면 좋겠는데. 연분홍색은 왠지 더 연약해지는 느낌.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도 같이 쓰는 공간이니 어쩔 수 없다.


누운 채로 바로 옆에 놓인 폰을 들어 멜론에 들어가 키드밀리가 2016년에 낸 싱글을 틀었다. 룸메이트가 없을 때는 스피커폰으로 해놓는다. 신나는 노래는 같이 스피커폰을 해서 듣기도 하는데 어두운 노래는 같이 듣기가 좀 민망해서 혼자 듣는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스무 살 대학교에 오면서 분명히 뭔가 새로운 걸 찾기 바랐다. 하지만 연애도, 진로도, 뭐 하나 손에 잡히는 건 하나도 없다. 차라리 연애라도 진득하게 했으면 사람이라도 얻었지, 이건 손가락 틈으로 다 흘러버린 모래보다 남은 게 없는 대학생활이다. 차라리 대학을 안 가는 게 더 현명했나.


‘너의 스물셋은 곧 촛불처럼 꺼져 넌 말야’


스물셋이었구나 이때. 23살에 누군가는 첫 앨범을 내고, 누구는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 누워있다. 영원할 것 같은 대학시절에 취한 후 남은 건, 빨래건조대 위 바짝 마른 수건처럼 건조한 일상뿐이다.


스물셋의 여름은 흘러가고, 어느새 유월 한 달간의 교생실습은 시작되었다.

“너 실습 갔다 와서 공부해?” 같은 학교로 실습을 나간 동기가 기숙사로 돌아오는 버스를 기다리며 물었다.

“아니. 너는”

“난 인강만 들으려고. 너무 밀리면 따라잡기 힘들 것 같아서.”

실습을 갔다 와서 피곤한데도 공부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기 싫어서 실습이 끝나면 내 방으로 들어가서 밥 먹을 때랑 샤워할 때 빼고는 안 나온다. 룸메이트도 안 들어오는 날이 많아졌다. ‘실습 끝나고 공부는 무슨' 사실 난 한 달 전부터 공부를 안 하고 있었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왔다. 이게 맞나 싶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업로드되는 인강에 숨이 막힐 것 같다. 안에 있으면 점점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아서 학교 밖으로 나갔다. 생각을 할 시간이 없다. 아니, 생각을 하지 마라고 한다. 일 년만 참으라고 한다. 이렇게 청춘이 지나가는구나. 마치 메마른 땅에 버려지는 물 같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내 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일 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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