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의 조르바 호스텔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둘러쓰고 누가 들을까 숨죽여 꺽꺽 울어본 경험.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오지게 외로운 순간. 나에게도 있었다.
처음 홀로 떠나는 배낭여행지로 그리스를 결정한 것은 정말 단순하게 겨울이라 남부 지방이 따뜻할 거란 기대에서였다. 게다가 산토리니의 파랗고 하얀 집들은 사진으로만 보아도 얼마나 황홀하던지. 꽂히면 무작정 돌진하는 나는 가기로 마음 먹은 후부터 뒤돌아보지 않고 여행 준비를 했다. 그러나 설레는 마음으로 떠난 것도 잠시, 막상 비행기에 올라타자 현실이 실감 났다. 나는 혼자이고, 여자고, 가지고 있는 건 오로지 현금밖에 없었다. 핸드폰도 로밍을 해야 통화를 겨우 할 수 있는데 요금도 어마어마하게 비싸서 여행자 전화카드만 있는 상태였다. 어느 이름 모를 곳에서 실종되어 연락두절되어도 아무도 찾지 못할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창밖을 보니 새카만 밤하늘에 희뿌연 구름이 낮게 보였다. 어딘 지 모를 낯선 상공 위를 날고 있었다. 온몸이 벌벌 떨려왔다.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이런 모험을 시작했을까.
아침 일찍 아테네에 도착했다. 산 어딜봐도 울창한 숲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구릉에 가까운 낮은 산들엔 듬성듬성 점처럼 찍혀있는 낮은 나무들만이 옹골지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스의 상징, 올리브 나무였다. 비행기에서 바라본 첫 인상이 올리브 나무라니. 여신 아테네가 척박한 땅에 준 선물이라는 말이 이해가 갔다. 유시민 작가는 <유럽 도시 기행 �>에서 ‘그리스의 대지는 인생의 모진 풍파를 견디고 이겨내느라 기운을 다 써버린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고 묘사한다. 작가의 말 그대로 아테네의 첫 인상은 척박했다.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내리자 오른쪽에 옛 복장을 한 사람의 동상이 있고 내 뒤 편엔 뼈대만 남은 신전이 있었다. 그리스의 독립을 지지한 시인 바이런의 기념상과 제우스 신전이었다. 바이런이 누군지 모른 채 고개를 들어 동상을 바라보았다. 서양의 조각상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 사진을 찍었다. 다시 옆으로 돌아 기둥만 남아 있는 신전을 바라봤다. 넓은 들판에 홀로 서 있는 고독한 유적지를 본 적 있는지. 15개의 기둥과 상판 몇 개만 남아 있음에도 몇 천년 나이먹은 건축물은 묘한 위엄이 있었다. 나는 신전의 분위기에 압도당해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그러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아, 맙소사. 아크로폴리스였다. 파르테논 신전, 디오니소스 극장 등 역사적으로 유명하고 중요한 유적지가 모여 있는 이 성채는 그야말로 아테네의 정수였다. 거대한 언덕 위 품위 있고 고고한 파르테논 신전이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두려움이 조금 가셨다.
숙소를 찾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혹시나 잘 곳을 못 찾게 될까봐 여행 초반 묵을 숙소를 한국에서 미리 예약을 해뒀다. 빡빡한 예산에 저렴한 도미토리를 예약했는데 위치가 시내 중심부에서 멀었다. 한참을 헤매다 착해 보이는 여성에게 길을 물었다. 주소를 보여주니 대번 위치를 알려줬다.
“빅토리아네요. 저쪽으로 쭉 내려가면 오모니아 광장이 있어요. 거기서 전철타면 되요.”
대화를 할 일이 없으니 길을 가르쳐 준 사람마저 너무나 반가웠다. 우린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며 몇 마디 나누다 헤어졌다. 친절한 여성은 이디오피아에서 왔다고 했다. 그는 낯선 나라에 온 내 심정을 아는 듯 내내 따뜻한 눈길을 주다 자신의 길을 갔다. 멀어지는 여성을 아쉽게 바라보다 다시 발걸음을 뗐다.
후미진 골목에 조르바 호스텔이 있었다. 사진으로 봤던 방들이 깔끔해 보여서 이 정도면 괜찮겠다 싶어 결정한 곳이었다. 로비에 들어서니 오크색 커다란 리셉션이 보였다. 금발의 숏컷을 한 여성이 리셉션에서 내가 들어오는 모습을 건조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내 이름을 대니 예약자 리스트를 보며 무뚝뚝하게 “Passport” 한다. 여권을 건네자 체크인을 하고 방을 안내해줬다. 리셉션 바로 뒤에 방이 있었다. 여자가 딱딱하게 방을 가리키고, 난 조용히 들어갔다. 빛줄기 하나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어두침침한 방. 비쩍 마른 프레임에 딱딱한 빵 같은 매트리스. 영화에서나 보던 난민수용소 같은 방이 눈에 들어왔다. 허름하고 장식 하나 없는 방에 다섯 개의 침대가 무심하게 놓여있었다. 어디선가 쥐가 나올 것만 같고 조금만 머물러도 몸에 곰팡이가 생길 것 같았다. 사진에서 보던 방이 아니었다. 어쩐지, 6인실보다 5인실이 왜 저렴한가 했더니 이런 이유였다.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그나마 햇빛이 좀 들어올까 싶은 창가에 자리를 잡고 하루종일 메고 있던 배낭을 내려놓았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으려니 리셉션에서 여권을 돌려주지 않은 게 기억났다. 리셉션에 가 여권을 달라고 하니 전화를 받고 있던 여자가 냉랭하게 여권이 ‘deposit’ 되었다고 했다.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여행자 커뮤니티에서 유럽의 게스트하우스 중 숙소비를 다 받을 때까지 여권을 돌려주지 않는 곳이 꽤 있는데 불법이니 꼭 돌려받으라는 게시물을 여러번 봤다.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여권은 내가 소지한 하나뿐인 신분증이자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안그래도 머나먼 타국에서 길 잃은 고아 될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는데 여권을 뺏기다니, 말도 안돼는 일이었다.
나는 전투태세를 갖추고 여권을 달라고 달라고 달라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표현과 감정을 토로하며 여자에게 말했다. 여자도 만만치 않았다. 논리정연한 말로 설득한 것도 아니고 그저 “No”와 “deposit”만 반복했다. 내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여자는 받고 있던 전화를 날 건네주었다. 상대방은 숙소의 사장같은 남자였다. 그는 훨씬 정중한 태도로 여권은 나중에 꼭 돌려줄 것이라고 날 달랬다. 울화통이 터져 전화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여권은 내 거에요! 당신은 나에게 여권을 줘야 합니다!”
남자는 결국 알겠다고 하고 여자를 바꿔달라고 했다. 전화를 받은 여자는 날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며 여권을 돌려주었다. 푸른 빛이 도는 파란 눈에 냉기가 서렸다. 던지지 않은 게 다행일 만큼 차가운 눈빛이었다. 방으로 돌아와도 여자의 눈빛은 잊히지 않았다. 그것은 동등한 입장에서 싸움을 한 상대방의 눈빛이 아니었다. 우위에 있는 자가 자기보다 훨씬 아래에 있는 어떤 것을 바라보는 눈빛, 혹은 싫어하는 동물이나 벌레를 보는 눈빛, 혐오의 눈빛이었다. 사람이 살면서 그런 대우를 받은 적이 얼마나 있겠는가. 나는 거대한 사자에게 몇 번 찢기고 겨우 도망친 영양 같았다. 살아났지만 무력하고 작아진 기분이었다.
정신은 말똥말똥 했지만 긴 여정에 꽤나 피곤했기 때문에 곧바로 골아떨어졌다. 평생 꿈에 가족이 나온 적이 없었는데 엄마, 아빠, 동생이 꿈에 나왔다. 항상 곁에 있었지만 소중함을 몰랐던 모든 것들을 꿈에서 봤다. 울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여전히 회빛 방안이었다. 집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되돌아 갈 수도 없고, 어차피 출국날까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로 한 달이나 여행을 해야한다니…… 가보진 않았지만 군대 훈련소 가면 이렇게 갇혀 있는 기분일거라 생각했다. 남자 동기들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방구석에서 혼자 울고 있으니 내 신세가 처량 맞았다.
진한 외로움의 기억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조르바 호스텔이 다시 떠올랐던 것은 여행이 지나고 몇 년 후, 이제 막 회사원이 되었던 신입사원 시절이었다.
어느 날 같은 팀의 친한 동생에게 퇴근 후 늦게 전화가 왔다.
“그만두기로 했어.”
그 동생을 시작으로 동기들이 하나 둘 팀장에게 불려가더니 하루에 한 두명씩 회사에서 보이지 않았다.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회사가 도저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자 제일 먼저 신입사원들을 내보냈던 것이다. 아주 조용한 일처리였지만 흉흉한 분위기는 무엇으로도 덮이지 않았다.
이제서야 고백하자면 친한 동생이 그만두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저 그건 남의 일이었다. 다음 날 부장님에게 불려가 ‘너도 대상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기 전까진. 3년 간 무직으로 있다 겨우 취업을 했는데, “너도 주시하고 있으니 잘 해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절망감이란. 내가 아주 약자라는 걸 그 때 알았다. 그 후로 나의 회사생활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당연히 회사 가는 게 즐거울 리 없었다. 그렇지만 누구보다 의욕 넘치는 척 해야했다. 회사에 들어가면 힘차게 “안녕하세요!”하며 하루를 보내고, 퇴근하며 집에 가는 버스에서 내내 울었다. 6개월을 그렇게 매일 울면서 집에 갔다.
나는 일이 힘들어서 울지 않았다. 다만 나를 한 번 짓이긴 회사가, 경영진이, 못 돼 먹은 윗 사람들이, 뺨 때리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회사는 악질이었다. 잘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나가는 건 모두 네가 잘못해서’라고 했다. 정말 그들이 잘못한 것도 아니었다. 사업이 항상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지만 어쨌든 성공하지 못한 건 회사 탓이지 신입사원들 탓이 아니잖는가. 울음이 그치지 않아 목도리를 뒤집어 쓰고 목으로 울음을 넘기며 엉엉 운 적도 있다. 그 때, 조르바 호스텔이 생각났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시간은 갈 테고, 어떻게든 한 달을 여행해야했다. 무작정 밖으로 나와 근처 카페에 앉아 빵과 우유를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각오를 단단히 하자. 정신 똑바로 차리자. 어떻게든 살아남을테다. 빵을 먹으며 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아크로폴리스에 가자. 아테네에 온 이유, 아테네의 정수를 보러 가자.
전 세계 사람들이 몰려드는 아크로폴리스엔 여러 인종이 몰려 있었다. 대부분 관광객들이었다. 나 역시 관광객이다보니 이상하게 소속감이 느껴지며 안정감이 들었다. 정상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을 보러 가기 위해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저 앞에서 익숙한 말이 들려왔다. 한국 사람들이었다. 해외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더니, 한국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사람들이 내게 가까워져 왔다. 그 때, 내 안에서 뭔가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나는 그들을 향해 똑바로 인사했다. 여느 때 였으면 그냥 지나쳤을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해외에서 만난 한국인이더라도 모르는 사람들 아닌가. 한국인 만났다고 인사하는 게 왠지 유치하고 촌스럽다 생각했는데 내가 그러고 있었다. 마주 오는 사람들이 날 보며 환하게 웃었다. 내 속에서 무언가 변했다. 그건 내가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 내면 어디에서부터 꿈틀대고 힘을 내는 과정이었다.
자신이 정말 약하고 작아졌을 때 그걸 다시 일으킬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였다. 강한 사람은 위축되는 상황에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난 무의식 중에 알았던 것이다. 이후에도 난 더 적극적으로 하고 싶은 건 하고, 가고 싶은 곳에 갔다. 홀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있거나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먼저 다가갔다. 그러자 남은 일정을 채우기 위해 억지로 여정을 보내는 것이 아닌, 여행의 모든 걸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집에 돌아가는 버스에서 눈물을 흘리는데, 아테네에서 빵을 우걱우걱 먹으며 마음을 다잡았던 때가 생각났다. 나에게 있어 처음으로 좌절하고 다시 일어섰던 순간이었다. 난 결국 모든 여정을 거쳐 여행을 끝내고, 좋은 추억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여권을 리셉션에 맡기는 것은 당시엔 자연스러운 관행이었다. 그게 불법이고 아니고를 떠나 그렇게까지 긴장하고 좌절할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리셉션에 있던 숏컷의 금발머리 여자도 많이 누그러져 나에게 미소까지 지어주었다. 모든 것이 경험이었고, 모든 순간이 나 자신을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었음을 여행이 끝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조르바 호스텔을 떠올리자 다시 일어날 힘이 생겼다. 나는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저런 어른이 되지 않겠다’, ‘저런 윗사람이 되지 않겠다' 매일 각오를 했다. 사실 무력하고 힘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다짐 뿐이었다. 이상하게도 다짐을 할 때마다 매번 눈물이 나왔지만 회사에서는 더욱 웃고 더욱 열심히 일했다. 쓰디쓴 경험에서 헤어나오는 데엔 얼마 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다른 회사로 이직하고, 대리가 되고 차장이 되고 부장이 되면서 나는 더 이상 그 때를 떠올려도 울지 않게 되었다. 그 감정을 잊은 게 아니다. 그저 모든 게 과거가 되었다.
모두에게 그런 순간이 있다. 아무에게 말하지 못하고 모든 감정과 경험을 혼자 끌어안고 삭혀야만 하는 순간이. 그 때 사람은 오지게 외롭다. 그러나 그 외로움이 자신을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방구석에서 홀로 숨죽여 울고 있을지라도, 너무 좌절하지 마시길. 모든 게 지나가고 그 길에서 당신은 더 단단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