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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영 Jun 01. 2020

일본과 대만 사이, 겨울의 산토리니

산토리니

매일 뉴스를 읽는다. 유튜브를 본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 하는지, 중국은 현재 어떤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지, 

홍콩은 어떻고 대만은 어떻고......

실체가 있는지 알 수 없는 껍데기의 말들이 인터넷을 휘젓는다. 

우리나라 왼쪽, 오른쪽에 있는 나라들과는 어쩔 수 없이 매번 이런 실랑이를 하며 지내야 하는 것일까.

유럽 대륙의 나라들이 오랜 세월 전쟁하고 합가하며 나라를 만들어 왔던 것처럼. 

물리적으로 '이웃'인 나라들 사이의 갈등과 간극은 피할 수 없는 돌뿌리 같다. 

이런 뉴스를 볼 때마다 난 산토리니를 떠올린다. 

일본인과 대만인 사이에 한국인이 있고 세 나라 사람이 한 나라 사람처럼 떠돌던 겨울의 그리스 섬. 


산토리니의 일출


페이, 쟈시엔과는 산토리니에서 만났다. 

산토리니 섬에 처음 내리자 그리스인 특유의 짙은 검은 곱슬머리에 수염자국이 있는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겨울의 그리스는 찾는 이가 없어 황량하다 못해 휑하다. '숙박을 찾느냐' 묻는 호객꾼이 한 명이니 그를 따라갈 수 밖에. 배에서 내리기 직전 태극기를 가방에 붙인 민주 언니와 말을 트고 함께 숙소를 구하기로 한 직후였다. 아저씨의 차에 타니 우리와 같은 배에서 내린 여자 둘이 타고 있다. 중국어를 하는 걸로 보아 중국인 같았다. 페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우린 대만인이야."


페이는 아주 활발하고 귀염성 있는 성격의 아가씨였다. 고불고불 파마한 짧은 머리에 눌러쓴 털모자가 그의 성격을 단번에 보여주었다. 나이가 꽤 어려보였으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했다. 영어를 잘 해서 그런지, 페이는 항상 자신감 있고 활기차고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러나 이런 페이와는 정 반대로 옆의 친구는 무덤 속까지 비밀을 가져갈 것처럼 매사 조심스럽고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쟈시엔. 어깨까지 오는 생머리에 차분한 눈동자가 수수한 매력을 돋보이게 했다. 비슷한 사람끼리 친해지기도 하지만 정 반대의 성격끼리도 친해진다고, 이 둘은 의외로 잘 어울렸다. 


페이, 쟈시엔과 처음 갔던 고대 피라


아시아에서 온 여자 넷은 곧 친해졌다. 문화가 영 다른 곳에 가면 그나마 비슷한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은 거의 한 나라 사람이나 진배없다. 우린 함께 까마리 비치에 갔고, 고대 피라에 등반해 저 멀리 지중해 경치를 구경했으며, 일몰을 보러 버스를 타고 이아 마을에도 갔다. 


이아 마을은 유령 도시나 다름 없었다. 허물 벗겨진 것처럼 하얀 페인트칠이 얼룩덜룩한 건물들은 집주인도 관광객도 없이 빈 과자박스마냥 덩그러니 남겨져 있고, 떠돌이 개들만 우리를 반겼다. 잠시 쓸쓸했지만, 마을에 막상 들어가니 신이 났다. 아무도 없는 드넓은 관광지가 오롯이 우리의 놀이터였다. 


이아 마을에서의 페이


떠돌이 개 네 마리가 마치 가이드처럼 우리를 따라다니며 친절하게 마을을 안내해 주었다. 조용한 이아 마을 그리고 저무는 해…… 맞은 편 수평선에 해가 지며 칼데라 지형으로 움푹 들어간 절벽에 마지막 빛을 비추었다. 옹기종기 모인 하얀 집들이 오렌지 빛으로 빛나고, 그 아래 푸른 바다는 초록빛으로 고요해졌다. 지금까지 본 석양 중 가장 아름다운 석양이 지고 있었다. 


해 지는 이아 마을


카츠히사와 코스케를 만난 건 그 다음 날이었다. 

아침 일찍 아테네로 가는 일정이었는데 날씨가 안정적이지 않아 배가 들어오지 않았다. 페리 스케줄에 대해 물어보자, 호텔 카운터에서는 확정되지 않다고만 말을 해줬다. 우선 체크아웃하고 섬을 좀 더 돌아보기로 했다. 레드 비치를 보러 갔는데, 웬 동양인 남자 둘이 마을 앞을 헤매고 있었다. 문을 열지 않은 상점들 앞에서 서성이는 건 우리 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르고 삐쭉삐쭉한 헤어스타일을 보자 페이가 나에게 속삭였다. 


"저 사람들 일본인 같아."


레드 비치에서의 코스케


겨울의 그리스 섬에 오는 건 아무래도 지중해에 환상이 있는 동양인들 밖에 없는 것 같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중해는 따뜻할 거야’란 착각은 나만 하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호기심에 그 둘에게 말을 걸었다. 


"거기 문 닫혔어요."

"아 그래요?"


주인이 있는 것 같았는데 혼자 언덕을 헤매고 있던 당나귀. 어차피 일 하지 않아도 되니 헤맬 시간은 충분하다.


몇 번의 대화가 오고가고 일행은 4명에서 6명으로 늘어났다. 한 명은 마르고 수줍은 성격의 카츠히사, 건축학 전공하는 학생이고, 또 한 명은 안경 끼고 지적인 인상의 코스케로 철학 공부를 한다고 했다. 둘 다 매우 말이 없었다. 남자 친구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흔한 장난이나 시시덕 대는 농담 조차 거의 없었다. 진중하다고 해야 할지, 생기가 없다고 해야 할지 싶을 정도였지만 둘은 묵묵히 여자들의 일정을 따라주었다. 


올드 포트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비용 정산을 할 때 나는 동전까지 정확히 계산해 거스름돈을 코스케에게 건넸던 적이 있다. 코스케가 잠깐 멈칫하며 "어어"라고 동전을 받았을 때의 그 모습을 기억한다. 예의 바르고 수줍은 손이었다. 


내내 고요했던 코스케. 올드 포트에서.


소녀 같은 대만 여자 둘, 무덤덤한 한국 여자 둘, 조용한 일본 남자 둘이 어쩌다 겨울의 그리스 섬에서 만나게 되었는진 알 수 없다. 내가 그리스 섬에 환상이 있던 것처럼 다른 이들도 그랬을 터이다. 알고 보니 산토리니의 위도는 36도로 우리나라 태안이랑 비슷하다. 태안에 겨울에 해수욕하러 가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게다가 페이, 쟈시엔이 온 대만은 위도 23도, 카츠히사, 코스케가 온 요코하마는 35도로 산토리니보다 오히려 낮은 곳에 있다. 착각을 해도 단단히 착각했다. 착각으로 뭉쳤다는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우리 여섯은 합이 잘 맞았다. 



함께 본 산토리니의 일출



우리는 아침부터 일출을 보겠다고 다 함께 해 뜨는 걸 보고 전망 좋은 레스토랑에서 아메리칸식 거대한 아침 식사를 했다. 친구들과 있으니 끼니마다 아주 푸짐하게 먹게 되었다. 산토리니의 식당은 정말 끝내주게 맛있거나, 다시 오고 싶지 않을 정도로 형편 없거나 둘 중 하나였다. 러시안 룰렛 게임처럼 우린 이곳이 맛있을지 저곳이 맛있을지 운에 맡기며 식당에 들어가곤 했다. 형편 없는 식당이어도 그리스의 음식은 조리법이 다양하고 신선한 재료로 만들기 때문에 기본 맛은 있어 그럭저럭 먹고 다녔다. 게다가 운이 좋아 우린 가는 곳마다 디저트를 얻어 먹었다. 전날 저녁에는 그리스식 샐러드, 믹스 수블라키 등 음식에 우조 한 잔씩 곁들여 먹었는데 음식 솜씨가 좋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실컷 먹었는데도 디저트로 카스텔라 비슷한 빵까지 주어 그것까지 뱃속으로 몽땅 들이미니 산토리니에선 배가 꺼질 새가 없었다. 



사람 없는 마을의 주인이 된 고양이들


떠나기 전 마지막 만찬은 전날 맛있게 먹었던 식당 바로 옆에서 먹었다. 나는 스터프드 토마토를 시켰는데 너무 셨다. 무사카를 시킬 걸 살짝 후회했다. 사장이 오더니 우리에게 우조를 한 잔씩 줬다. 우조(Oujo)는 한 번 걸러낸 포도주의 포도 껍질을 다시 압축해 아니스와 향료를 첨가해 만드는데, 도수가 40도가 넘는 독한 그리스 전통주다. 신기하게 우조에 물을 타면 우유처럼 하얗게 변한다. 마법처럼 술이 우유가 되는 모습을 장난스럽게 보여주던 사장님은 


“하지만 그리스 사람들은 우조에 물 타서 먹지 않아요. 술은 물 타서 먹는 게 아니지.”


라며, 술에 대한 ‘철학’을 논한다. 술에 물을 타지 않는다니, 그리스 사람들은 한국 사람과 뭔가 통하는 게 있다. 


“하나, 둘, 셋, 하고 한 번에 털어버려요!” 


먹는 방법까지 소주와 비슷하다. 그리스 사람들은 화끈하다. 


겨울의 그리스 섬은 페인트칠이 다 벗겨진 잿빛이다.


실컷 저녁 식사를 즐기다 보니 배 시간이 다가왔다. 숙소 아저씨가 차를 끌고 식당까지 우리를 데리러 왔다. 알고 보니 비도 오고 며칠 만에 배가 들어오는데 손님들이 배를 놓칠까 전전긍긍하며 우리를 찾으러 시내 전체를 뒤지고 다녔던 것이다. 차에 타보니 우리 짐들은 이미 실려 있었다. 아저씨는 화가 단단히 나서 우리에게 한바탕 역정을 냈지만 식은땀을 닦으며 운전하는 아저씨를 보니 미안한 마음이 더 들었다. 우리가 차에 타는 모습을 코스케와 카츠히사는 말 없이 바라보았다. 우리 차가 출발하자, 코스케가 수줍은 손짓으로 손을 잠시 흔드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둘은 택시를 타고 곧 항구로 따라왔다. 


점잖은 겨울 빛의 에게 해


배는 밤새 아테네를 향해 달렸다. 페이와 쟈시엔은 중간에 다른 섬에서 내렸다. 나는 일정상 로도스는 포기해야 했다. 계획은 바뀌었지만, 아쉬움은 없었다. 덕분에 사람 없는 거리에 주인이 된 개 고양이와 친구가 되었고, 여름의 활기를 그리워 하는 식당 주인에게 우조 한 잔을 얻어 먹었으며, 한동안 사람이든 짐이든 실을 걱정없이 한 겨울의 쉼을 즐기는 당나귀를 바라보았다. 내내 혼자였던 나는 한국에서, 대만에서, 일본에서 자라온 사람들과 한 낱 한 시에 그리스 외딴 섬에 함께 있었다. 이건 운명적인 일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서로의 길을 가는 혜성이 어느 날 어느 우주에서 마주친 것과 다름 없다. 


한국인과 일본인과 대만인이 비빔밥처럼 서로 어울렸던 산토리니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어디선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와’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그리스 섬으로 떠나 <상실의 시대>를 썼다. 산토리니 사진을 처음 봤을 때 가슴이 둥둥 울렸는데, 그 것이 나의 북소리였던 것이다. 꿈 같은 산토리니의 일몰이 생각난다. 오후의 햇살이 따사롭자 페이, 쟈시엔과 숙소 옆 교회 뒤 쪽으로 일몰을 보러 갔었다. 피라에서 보는 일몰은 이아 마을에서 보는 것 못지 않게 아름다웠다. 아니, 그보다도 훨씬 아름다웠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여서 그랬을 것이다. 


배가 피레우스 항에 닿고, 나는 코스케, 카츠히사와 서로의 행운을 빌며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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