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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영 Jun 30. 2020

길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이 인연이다

에페소에서 파묵칼레 가는 길

요새 <놀면 뭐하니?>의 싹쓰리 결성 과정을 아주 흥미롭게 보고 있다. 

2000년대 초반, 그 시대를 날리던 이효리와 비, 게다가 국민 MC 유재석이 가세한 트리오라니. 

린다G가 비와 유재석을 생각하며 썼다는 노래의 가사를 들으니 이들이 활동하던 시절부터 쭉 지켜봐 온 

동시대 사람으로서 이상하게 마음이 일렁인다. 사람의 인연이란 알 수 없지만 때론 끝을 모르게 깊기도 하다. 


"지난여름 바닷가 너와 나 단둘이

파도에 취해서 노래하며 같은 꿈을 꾸었지

다시 여름 바닷가

이제는 말하고 싶어

네가 있었기에 내가 더욱 빛나 별이 되었다고."


어떤 관계는 정말 서로를 별이 되게 하기도 한다. 



나는 인연이라는 말을 믿는다. 

이 세상에서 나를 스쳐간 사람들은 모두 몇 천년 전부터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는 말이 있다. 가끔 터키에서 무엇이 가장 즐거웠는지 생각해보면, 데니즐리에서 셀축을 지나 이스탄불로 왔던 버스를 떠올리곤 한다. 터키는 나라가 워낙 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까지 버스로 가는데 적어도 6시간, 조금 장거리는 10시간은 걸린다. 길고 긴 여정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난 낯선 장소에서 낯선 장소를 이동한다는 사실에 긴장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파묵칼레에서 에페소를 지나 이스탄불로 가는 모든 여정은 마치 나를 기다린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인연의 연속이었다. 


파묵칼레 가기 전 머물렀던 안탈리아


안탈리아에서 파묵칼레 가는 버스

안탈리아에서 하루 머물고 홀로 파묵칼레 가는 길이었다. 그 당시 나는 계속 동행이 있다 하필 그 일정엔 함께 하는 이가 없었다. 내내 배낭여행하는 사람들 틈에서 외로울 틈이 없다 동행이 없어지면 혼자라는 게 더더욱 와 닿는다. 혼자 하는 여행은 즐겁기도 하지만, 정말 나 자신과 친숙하지 않으면 사무치는 외로움을 절절히 느끼기도 한다. 오랜만에 혼자가 되니, 새삼 내가 '여행'하고 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 여기저기 소리치는 삐끼들, 정신없는 오토가르, 낯선 여행지와 낯선 사람들...... 다시 배낭끈을 꽉 쥐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 자리를 찾아 배낭을 막 내려놓으니 그제야 내 옆자리에 앉으려는 허리 꼬부라진 터키 할머니가 보인다.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태양이 뜨는 것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엉겁결에 함께 썩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태양이 가득했던 남부, 시데


버스가 출발하지도 않았는데 할머니는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당연히 터키어로. 당연히 못 알아듣는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듣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연신 미소를 지으며 꿀 먹은 벙어리처럼 쳐다만 보았다. 옆에 지나가던 차장이 웃으며 통역을 해주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한국이요.” 


차장이 몇 마디 통역해주고 지나가자 할머니는 또 연신 지중해 햇빛 같은 웃음을 지으며 열심히 말을 한다. 

나에게 조언을 해주는 건지, 한국에 대해 물어보는 건지, 아니면 본인이 시장에서 뭘 사 왔다는 이야길 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호의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할머니를 실망시키지 않으려 애썼다. 그 할머니는 타국에 온 외국인 여행자에게 최대의 호의를 베푸는 중이었다. 


내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할머니는 말을 하고, 내 얼굴을 한 번 바라보고, 계속 헤헤헤 웃었다. 그 눈빛과 웃음은 나를 아기로 바라보는 할머니의 시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어느새 긴장의 틈을 내려놓고 할머니의 눈을 그저 바라보았다. 


지중해를 바라보며 기도한다는 건 어떤 마음일까


어느 나라 할머니들이나 ‘없는 것 없는’ 보따리가 있다. 할머니는 자신의 보따리를 뒤지더니 나에게 뭔갈 건넸다. 치즈 넣은 큰 바게트 빵 두 덩어리. 난 엉겁결에 빵을 건네받았다.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치즈빵을 먹었다. 덜컹덜컹. 버스는 터키 남부에서 중부를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태양 같은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이제야 내가 '진짜'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여행객들을 만나고, 가이드 투어를 하고, 여느 뻔한 여행을 하던 나는 할머니를 만나서야 '진짜'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 나라 관광지를 가고, 그 나라 음식을 먹는 차원을 떠나, 그 나라 사람을 만나는 것만이 그 나라의 진수를 알 수 있게 한다. 나는 치즈 빵을 건네준 인자한 호호 할머니가 터키의 진정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 지는 따뜻한 파묵칼레에 발을 담그고 석양을 바라보았다



셀축에서 이스탄불 가는 버스

셀축에서 탄 버스에선 처음부터 내릴 때까지 현지인들의 황송한 친절을 받았다.


버스에 타자마자 문제가 생겼다. 내 버스표에 문제가 있는지, 이미 내 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하는 수없이 다른 빈자리에 가 앉아 있으니 다음 정거장에서 자리 주인이 나타났다. 그때부터 버스 안은 난리가 났다.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는데, 이 외국인에게 친절한 터키 사람들은 당사자인 나만 빼고 자기들끼리 큰 소리로 온갖 토론을 했다. 자리 주인과 차장부터 주변 앉은 사람들까지 가세해 어디에 어떻게 앉아야 하는지 어디에서 내리는지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런데도 정작 나에게는 모두가 웃으며 말했다.


“No problem!”


이 난리가 났는데 노 프라블럼이라니. 나는 그저 자리에 앉아 있으란다. 소리 높여 떠드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쩜 저렇게 내 일처럼 나서서 토론을 벌이는지. 한참을 떠들어도 해결이 안 되자, 결국 차장이 나에게 오며 미안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정말 미안한데, 자리 좀 옮겨줄 수 있어?” 


그는 정말 미안한 표정이었다. 나는 옳다구나 하며 자리를 옮겼다. 나 하나 옮기는 것으로 모든 상황은 종료, 정말 No problem이 되었다. 


평화로운 중부 소도시, 셀축



맨 뒷자리로 이동하니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꼬마와 엄마, 이모로 보이는 어른 둘이 앉아 있었다. 활발해 보이는 아이의 이모가 나에게 말을 걸며, 자기는 에디, 꼬마는 데니스라고 소개했다. 이미 한바탕 자리 소동으로 내가 궁금했을 터였다. 데니스는 내가 신기했는지 계속 쳐다보고 웃었다. 이 귀여운 가족은 내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빵도 주고 땅콩도 주고 깻잎에 싼 볶음밥 같은 것도 나누어 주었다. 잎에 밥을 넣은 음식은 처음 먹어봤는데 무척 맛있었다. 


포도잎에 양념한 밥을 넣은 ‘야프락 사르마’ 혹은 ‘야프락 돌마스’라고 한다. 이름도 몰랐던 음식인데 터키에선 흔히 먹는 김밥 같은 것 같았다. 포도 잎에 밥을 넣어 돌돌 만 다음 도시락에 차곡차곡 넣어 온 모습을 보니 마치 김밥 싸서 온 가족이 나들이라도 가는 모양이었다. 한 개를 집자 더 가져가라며 에디가 권유했다. 사랑스러운 사람들이다. 나도 아침에 산 만다린과 땅콩을 나눠 주었다. 버스 맨 뒷자리에서 친구들과 터키식 김밥과 간식을 나눠 먹으니 꼭 소풍 가는 기분이 들었다.  


데니스 가족은 부사(Bursa)에서 내렸다.



나를 가족처럼 챙겨준 데니스 가족



데니스 가족이 내리자, 이젠 버스 차장이 나를 챙기기 시작했다. 혼자 있는 내가 심심해 보였는지 가끔 옆자리에 앉아 말을 걸어주었다. 빵을 주는 시간이 되자 앞자리부터 나눠주고 남은 빵을 모두 나에게 먹으라며 건네주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누구나 다 버스에서 그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났던 건 아니었다. 버스 차장에게 빵 하나 더 달라고 요청했다 단칼에 거절당한 다른 여행자들도 있었다. 



보름달이 휘영청 뜬 마르마리스 해협에 어느새 도착했다. 이스탄불에 도착해서도 난 친절한 터키 사람들의 도움으로 전철역을 무사히 찾고 표까지 끊을 수 있었다. 길을 가던 모자는 내가 역 위치를 묻자 아예 역까지 직접 데려다주고 자기들 돈으로 표까지 사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이름도 모르는 그들의 친절에 나는 연신 "Thank you Thank you"만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여느 관광지보다도, 나에겐 진짜 터키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가장 즐거운 여행지는 장거리 버스였다. 


내가 그렇게 좋은 여정 속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건 다 인연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류시화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 보지 않는다>에서 인연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혼자 걷는 길은 없다. 당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여행을 하든 과거에 그 길을 걸었던 모든 사람, 현재 걷고 있는 모든 사람이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당신과 함께한다. 당신은 그 모두와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데니즐리 가는 버스에서 하필 그 친절한 할머니를 만났고, 우연히 셀축에서 동행을 만나 에페소 일정이 바뀌었고, 그 덕분에 버스에서 나를 위해 난상 토론을 벌이는 손님들과 데니스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버스에서 친절한 차장들을 만났고, 이스탄불에서 전철표를 사준 모자를 만났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내가 가는 여정마다 아주 완벽한 위치에서 완벽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나의 완벽한 여행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모든 게 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모든 터키 사람들이 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처럼 친절하진 않을 테다. 나는 어쩌면 내가 길에서 만난 모든 이들이 아주 예전부터 만나기로 정해져 있는 인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의 외로운 여행길에 별이 되어주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주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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