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 없이 순간을 즐기는 것
올여름, 갑자기 떠난 부산여행은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흐뭇한 미소가 내내 끊이질 않았던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 사실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건, 기준이 없었다. 날이 좋아야 했다던지, 식도락을 즐기러 떠나야 했다던지 하는 그런 계획이 전혀 없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계획한 거라곤 광안대교가 훤히 보이는 숙소와 떠날 비행기표의 시간이 전부였다. 그것이면 됐다. 내가 떠날 목적지가 있다는 것과 편안하게 쉴 숙소가 보장되어 있다는 것으로 이미 만족했다.
여름휴가가 절정을 이루던 8월 초였다. 코로나 19는 살짝 주춤했고 다들 국내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가던 시즌이었다. 사실 여름방학에도 딱히 어딜 갈 계획이 없다가 문득 떠난 것이라 숙소도, 표도, 동행도 급하게 구했다. 태풍과 장마가 연속적으로 몰아치는 때였다. 날씨는 하늘에 맡겼고. 당일날 나는 우산에 우비까지 챙겨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늘 여행가방에는 옷보다도 카메라를 먼저 챙기곤 했는데 이번엔 친구가 미러리스 카메라를 챙겨 온다기에 과감히 DSLR 카메라와 삼각대는 제외시켰다. 여름옷이라 짐은 가벼웠다. 가볍게 떠나는 여행은 오랜만이었다. 드로잉을 하고 싶어서 드로잉 재료를 간단히 챙기고 나의 여행 준비는 마쳤다.
비행기를 무사히 타고 내다본 창밖은 흐렸다. 맑은 하늘을 본 건 그저 흐린 창공을 뚫고 구름 위에 올라갔을 때 파아란 하늘을 잠시 본 게 전부였다. 부산에 도착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하자마자 장우산을 펼쳤다. 우산을 쓰고 곧장 책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책방골목으로 시장으로 발길 닿는 카페로 그냥 그때 나를 이끄는 곳으로 갔다. 버스를 타고 천천히 돌아가며 책도 읽고. 카페에 앉아 노트북으로 글을 쓰며 사진을 찍으며 온갖 여유를 누렸다.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나만의 시간이 평화롭고 행복했다. 저녁엔 친구가 오기로 했다. 일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그덕에 나는 저녁까지 자유를 누렸다.
숙소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캐리어를 끌로 숙소로 갔다. 광안대교가 보이는 숙소였다. 숙소 바로 앞에는 바다였다. 바다이다. 바다. 혼자서 아무와 대화 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이제 막 수다가 필요했다. 그때 마침 등장해준 나의 친구. 함께 늦은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밤바다를 끼고 식당을 찾아 걸으며 우리의 대화는 끊이질 않았다. 시원하게 물회를 먹고 숙소로 그냥 들어가긴 아쉬워 바다를 조금 걷다가 야식거리를 사들고 들어갔다. 우리에겐 전망 좋은 뷰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숙소에서 우리만의 파티를 열었다. 노트북을 챙겨 온 건 신의 한 수였다. 넷플릭스로 잔잔한 영화를 틀어놓고 맥주와 간단한 간식, 그리고 우리의 대화면 충분했다. 조명 몇 개만 켜 두고 나머지 불은 다 꺼버렸다. 광안대교의 반짝이는 다리처럼 우리의 밤이 사랑스러웠다. 새벽 3시쯤이 되어서야 우리도 잠을 청했다. 침대 옆에서 선명하게 들리는 파도소리는 참 좋았다. 파도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스르르 눈이 잠겼다.
철썩철썩 쏴아..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금세 잠이 들었는데 다시 파도소리에 눈이 떠졌다. 까만 어둠의 새벽이 지났을 뿐 여전히 새벽이었다. 손을 더듬어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실눈으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새벽 5시 45분을 지나고 있었다. 새벽에 눈이 떠진 건 오랜만. 어제 밤새 수다를 떨다가 새벽 3시쯤 잠이 들었는데.. 3시간도 채 못 잤다. 여행을 오면 늦잠병도 사라진다. 아주 말끔히. 약간은 긴장돼서 그런지 눈이 번쩍하고 떠진다. 침대 옆 하얀 커튼을 치면 눈앞에 바다가 있다. 그것도 광안대교와 함께. 멋진 뷰를 놓치기 싫었다. 잠도 오지 않길래 거실로 나갔다. 서서히 구름 사이로 해가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젯밤 비 내리는 하늘 탓에 하루 종일 흐린 하늘만 보다가 해가 잠시 머무른 하늘은 바닷가에 비쳐 반짝거리고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벌써 바닷가 산책하러 나온 사람이 보였다. 살짝 파도에 발을 담그기도 하고 장난스럽게 아무도 없는 바다를 홀로 독차지하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내다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바다는 모두의 것이다. 일찍 일어나서 바다를 독차지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곧장 바다가 시끌시끌했다. 아이들도 수영복에 튜브를 끼고 나오고 있었고 부모님도 뒤따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르신들도 산책하러 나오고 사람들도 하나 둘 이른 아침 바다를 보기 위해 나오고 있었다. 친구는 여전히 쿨쿨 잘 잤다. 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아침 드로잉을 했다. 아침의 바다는 새벽보다 조금 시끌했지만 생기를 되찾아 보기 좋았다. 누군가의 바다에서 모두의 바다로 회귀하고 있었다.
드로잉을 마치고 어제의 파티 현장을 돌아봤다. 빈 병과 쓰레기를 분리수거한 일뿐이었다. 화장을 하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친구는 그제야 잠에서 빠져나왔다. 친구가 준비하는 동안 바다를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시간을 재촉하는 사람도 없었다. 참 반짝반짝하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오늘도 계획이 없었다. 그래도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친구는 차를 빌려서 드라이브를 하고 싶었고 나는 영도라는 섬에 가고 싶었다. 우리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소카를 빌려서 영도로 떠났다. 면허는 있지만 운전을 못하는 나는 조수석에 앉고 친구는 나를 데리고 광안대교를 가로질렀다. 너무 신이 났다. 친구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함께 즐기며 우리의 이튿날이 시작됐다.
어제 친구를 기다리며 혼자 먹은 크로플이 너무 맛있어서 크로플을 파는 카페로 갔다. 주문한 커피와 음식은 괜찮았다. 눈이 번쩍 뜨이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맛있다고 할 수는 있었다. 그냥 눈 앞의 음식보다 같이 사진 찍고 수다 떨고 하는 시간 자체로 좋았다. 배를 채우고 흰여울 문화마을을 찾아갔다. 언덕이 참 높았다. 생각지 않게 땀도 뻘뻘 흘렸다. 중간에 자판기에서 생명수 같은 물을 사 먹는데도 웃음이 났다. 날은 여전히 흐렸고 희멀겋게 수증기로 가득한 하늘만 보고 왔다. 바다도 흐릿했지만 나는 여행 중이었고 친구와 함께였다. 오후 늦게 까지 잘 돌아다니다가 다시 숙소로 왔다. 이제 폭우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니 우산이 소용없을 정도로 엄청난 폭우가 내렸다. 우린 안전했다. 밖에 더 돌아다닐 수 없어 아쉬웠지만 숙소에서 다시 우리만의 수다파티가 열렸다. 여행을 마무리하며 같이 찍은 사진을 구경하고 우리의 웃음소리는 계속됐다. 아쉬움에 비 오는 광안대교의 밤바다를 드로잉 했다. 그래도 이번 여행이 만족스러운 것은 날씨도 맛있는 음식도 멋진 카페도 아니고 마음이 맞는 친구와 소소한 여유를 공유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책방이며 드로잉도 할 수 있었고 친구가 좋아하는 드라이브도 했다. 개인의 시간과 함께의 시간 둘 다 있어서 참 좋았던 것 같다.
사실 여행이라는 것 자체로 모든 선택은 만족스러움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 상황을 즐길 수만 있다면. 계획이 좀 틀어져도 흥미진진할 것이다. 우리는 일상과 여행을 분리한다. 하지만 삶은 일상도 여행도 다 포함하는 것이다. 일상을 탈출해야만 여행이 아니다. 그저 일상의 행복을 모아놓은 것에 여행이라 이름 붙여준 것뿐이다. 나의 일상을 여행처럼 만족스럽게 즐기려면 일상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소소하게 끼워 넣으면 된다. 수고한 나에게 주는 작은 이벤트처럼. 내가 좋아하는 영화 한 편을 보고 잠이 든다던지. 좋은 옷을 사준다던지. 그 모든 순간을 놓치지 말길. 나의 순간들은 모두 여행이었음을. 충분히 만족스러운 하루는 계속될 수 있다. 그 상황을 즐기면 된다. 어떻게 흘러가던지 잘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