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올리브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익숙했던 시절이 있었다. 사범대를 다니며 교육실습을 할 때부터 나는 공식적인 선생님으로 불렸다. 교육이 나와 잘 맞는 것인지 불확실했지만 선생님이란 호칭에 대한 책임과 부담을 느꼈다. 이후 전공을 살려 들어간 직장에는 수많은 선생님이 있었다. 여러 직무로 호칭이 나뉘는 일반 직장과 달리, 공립학교 기관은 통칭하는 ‘선생님’ 이름 아래 다양한 직무를 수행한다. 영양교사도 보건교사도 교육과정 교사도 방과후 교사도 교육실무사도 보조교사도 실습생도 자원봉사자도 원장도 원감도 그냥 ‘선생님’이라는 호칭 하나면 된다. 나도 그중 한 명으로 선생님이란 호칭을 부여받았다. 우리에게 선생先生이란 이름 뜻 그대로 먼저 난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일뿐이었다. 물론 임용시험의 쓴맛을 몸소 경험했기에 그것을 견디고 교사로서 선생님이 되는 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너무 잘 안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누구나 한 번쯤 불릴 수 있는, 너무도 쉽게 주어지는 이름 같았다.
처음 퇴사했을 때, 나는 독립출판으로 책을 냈고 입고한 책방 사장님들로부터 ‘작가’로 불렸다. 아주 어색했지만 듣기 좋았다. 자아가 새롭게 탄생한 기분이었다. 이전에 들었던 선생님만큼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이름도 아니었다. 누구나 글을 쓸 순 있지만 어떤 책의 저자가 된다는 건 그리 흔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유명한 작가님들에 비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아주 보잘것없는 독립출판 작가였지만 그래도 좋았다. 작가여서 좋았다기보다 처음으로 선생님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는 게 좋았다. 정확히 내가 하는 일을 상기할 수 있도록 호칭으로 불러주는 게 좋았다. 내 책을 좋아해 주는 몇 안 되는 독자도 생겼다. 열심히 글을 써서 작가라는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처음부터 작가가 되려고 글을 쓴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레 작가로 불리면서 깨달았다. 내 이름 뒤에 붙일 호칭은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이름은 멋졌지만 이름 없는 작가가 직업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이내 현실을 자각하고 다시 선생님이라 불리는 집단으로 들어갔다. 어떤 일을 해도 똑같이 불리는 이름에 대한 만족감은 여전히 없었지만, 생계를 위해 꾸역꾸역 일했다. 어느 순간, 이 일에서 의욕 없는 내가 선생님으로 불리는 게 부끄러웠다. 매년 스승의 날은 돌아왔고 아이들이 카네이션과 손 편지를 건넬 때 나는 어떤 스승인지 고뇌에 빠졌다. 스승의 무게를 알기에 적어도 호칭에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스스로 느끼기에 나는 좋은 선생은 아니었다. 아이들을 끔찍이도 사랑하지만 내 자신이 더 소중했다. 아이들의 성장과 배움만큼 나의 성장과 배움도 절실했다. 교사가 행복하지 않으니, 아이들에게도 못 할 짓 같았다. 몸과 마음이 지쳤고 건강을 잃고서야 휴직했다. 다시 돌아간 만큼 퇴사 용기는 없었다. 일단 휴직하고 내 살길을 찾았다. 그러다 여러 기회가 찾아왔을 때, 선생이라서 겸직할 수 없는 부분들을 마주했다. 내가 속해 있는 집단은 취미나 봉사 하나 마음 편히 하지 못하게 했다. 자기 계발이나 자신의 성취도 교실이라는 울타리를 넘어가면 안 됐다. 원래 교육이 보수적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것저것 하고픈 게 많은 내겐 숨통을 조이는 조직이었다. 어딘가에 소속되기 위해 그렇게 발버둥 쳤는데 소속감을 버려야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게 슬펐다.
나의 가치를 되짚어 봤다. 누군가는 행복이 수단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행복이 궁극적 목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자아 성취가 행복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의 이름 뒤에 붙이는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는 걸 알았다. 나는 좋아하는 걸 쫓아야 비로소 살아나는 사람이었다. 다시 복직해서 학기를 마무리하고 과감히 퇴사했다. ‘개인 사유’라는 단 네 글자로 정신이 피폐해지도록 괴롭던 퇴사 고민이 끝났다. 나에게 남은 건 대학 전공과 애매한 교사 경력 그리고 수년간 임용시험을 위해 달려왔던 청춘이 공중에 흩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20대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허무했지만, 이제는 놓을 수 있어서 정말 후련했다.
서른이 되고서야 출판학교에 입학했다. 정확히 대학 입학했을 때와 십 학번 차이가 났다. 이런 내가 대단한 건지 웃긴 건지 사실 좀 헷갈렸다. 맏언니였지만 다시 대학생이 된 기분으로 수업 시간을 즐겼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더 잘하기 위한 배움과 선택이었기 때문에 즐거웠다. 학교생활도 잘 적응했고 매일 성장한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과제에 치여 쓰러져 잠드는 날에도 마땅히 겪는 시간이라 여겼다. 한 학기를 마무리하고 여름방학이 다가오면서 취업에 대한 조급함이 밀려왔다. 또래에 비해 나이도 적지 않았고 그동안 일했던 시간보다 쉬었던 시간이 더 길기 때문에 기회가 오면 언제든 취업할 생각이었다.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편집디자인에 흥미를 붙였고 글을 깊이 있게 다루는 편집자보다는 책을 편집하는 디자인의 전반적인 영역에 더 관심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디자이너로 출판사에 취업하고자 하는 명확한 목표가 생기고는 독립 출판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포트폴리오를 준비했고 북디자이너로 여러 회사에 지원했다. 파주와 서울을 오가며 다양한 출판사들로부터 면접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신입이라서, 관련 실무 경력이 없다는 매번 똑같은 이유로 최종 선택을 받지 못했다. 이러다간 신입 타이틀을 영영 못 벗어날 것 같아 한 발짝 물러서기로 했다.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역할이 아니더라도 주된 일이 책을 제작하는 회사이면서 다루는 콘텐츠가 내가 만들고 싶은 가치가 있는 책 디자인이라면 그 회사에 가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다 연락이 온 A사는 생각지 않았던 종류의 책을 다루는 회사였다. 하지만 다루는 콘텐츠가 좋아하는 문학, 특히 에세이였고 환경의 가치를 포함하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디자인과 특유의 분위기도 예뻤고 배울 점이 많아 보였다. 그렇게 바라던 조기 취업했고 디자이너라는 새로운 호칭을 얻었다. 그동안 여러 호칭을 바꿔오면서 가장 성취감이 컸던 이름이었다. 스스로 부여한 세 번째 이름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