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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 Oct 20. 2023

어떻게 아직도 이렇게

글 병아리콩

대학 졸업을 앞두고 시시때때로 불안에 시달렸다. 분명 바쁜 대학 생활을 보냈는데 돌아보니 남는 게 없었고, 미래를 생각하자니 막막했다. 이제는 사회로 나가서 돈을 벌고, '제대로 된 어른' 구실도 해야 할 텐데 당장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전공부터 교양까지 열심히 공부했고, 이런저런 동아리와 대외 활동도 틈틈이 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좋아하는 학문을 전공했지만]

나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국어국문학을 부전공했다. 진로가 명확하지 않았기에 좋아하는 학문을 대학에서 더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대학원에 진학하며 전공 공부를 이어 나갈 생각은 줄어들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의 공부는 차원이 달랐고, 공부할수록 내 능력과 재능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나는 칼을 갈고 닦기보다는 휘두르고 싶었다. 대학 졸업 이후 다시 사료와 논문을 연구하는 길로 들어서기보다는 회사에 나가 일하고 싶었다.

전공을 살리지 않고 취업하려 하니 원점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학과 공부가 내 미래와 별개로 느껴질 때면 전공 자체가 싫어지기도 했다. 전공과 진로가 일치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여러 친구들이 ‘소위’ 취업에 유리한 상경 계열이나 이공계로 전과나 복수전공, 재수의 길을 선택했다. 아예 로스쿨이나 고시 준비로 방향을 틀기도 했다. 모두가 진로를 향해 무언가 선택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대학 고학년이 된 나도 더 이상 하고 싶은 일을 잘 모르겠다는 핑계로 취업 준비를 미룰 순 없었다.


[빠른 취업에 성공했지만]

좋아하는 것이 명확하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걸 찾자는 마음이 되었다. 알음알음 취업 사이트에 들어가 채용 공고를 보기 시작했다. 수많은 배너와 공고는 처음에는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공고 형태가 익숙해지자 요구하는 스펙이 어찌나 높고 많은지, 나 말고 다른 지원자들은 어떻게 이 요건들을 충족하고 있는지 그저 의아해하는 시간이 계속됐다.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졌고 미친 듯이 불안해졌다. 그래도 나에게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높을 것 같은 자리를 조사해 보니 공기업 행정직과 사기업 스탭 직군 정도를 추릴 수 있었다. 영어 성적이나 컴퓨터활용능력 자격증 같이 비교적 공통적인 자격증 준비를 했다. 한 학기 휴학을 하며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를 하고 필기시험 문제집을 풀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졸업 전에 준공공기관의 행정직으로 취업했다. 지금 돌아보면 취업에 올인할 시간에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볼걸, 생각한다. 불안함과 열등감을 줄이기 위한 빠른 취업이 목표였지, 나에게 잘 맞고 행복한 진로를 찾는 것은 뒷순위로 밀어두었기 때문이다.

행정 일은 할 만했다. 특별히 재밌지도 않았지만 어렵지도 않았다. 크게 모난 사람도 없고, 안정적이니 이쯤 되면 최고의 직장이었다. 하지만 안정적이고 관습적이라는 장점이 나에게는 단점이었다. 근무 시간 이외에 즐거움을 찾는 사람도 많지만 나는 하루 8시간 이상을 투자하는 일에서 최소한의 성취감과 즐거움을 느껴야 하는 사람이었다. 나만의 전문성을 기르고 성장하고 싶어 하는 욕심이 큰 사람이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란 걸 일을 하며 알았다.

나도 회사가 어떤 곳인지 안다. 회사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회사는 즐거움을 찾는 곳이 아닌 이익을 추구하는 곳이고, 안 힘든 사람 하나 없다. 그래서 스스로 더 모질어졌다. 어느 조직에서나 피할 수 없는 점을 유독 힘들어하는 내가 미웠다. 나는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일까 봐 두려웠다.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과 계속 다니고 싶다는 마음이 모두 들 때, 어떤 쪽을 선택해야 할까. 매일 매 순간 서로 다른 마음이 치고 나와 결정하기 쉽지 않다. 이전에는 쩔쩔매던 업무를 이제는 손쉽게 처리할 때 뿌듯함이 든다. 동료가 챙겨주는 초콜릿 하나에도 기분이 좋아진다. 반대로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한숨 쉬는 또 다른 내가 있다. 안 맞는 틀에 억지로 끼워진 듯한 스트레스에 정신과 신체 건강 모두 악화되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진다. 퇴근하면 소진되어 나가떨어졌다.

‘시간이 지나면, 적응될 거야. 그냥 버텨. 누구나 겪는 과정이야’라는 생각과 ‘나는 이곳에 적응해 내 개성을 잃기 싫어. 내 미래가 기대되지 않아’라는 생각이 교차했다. 일요일 저녁이면 극도의 우울함에 시달렸고 출근할 때면 버스에 사고가 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을 하고 있다가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눈물이 났다. 이대로 일을 계속할 수 없다는 생각이 압도하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결국, 나는 이직처도 정하지 않고 퇴사라는 결정을 내렸다. 미친 짓이고 젊은 혈기였지만, 퇴사 의사를 밝히고 한 달 동안 일을 마무리하면서도 퇴사하겠다는 확신은 지워지지 않았다. 


[직무 전환에 도전했지만]

퇴사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좋아하는 일 찾기에 돌입했다. 진로 검사와 상담을 받았고, 스스로 여가 시간에 사비를 털어 무엇을 하는지 관찰하고 기록했다. 강연과 전시에 갔고 해외여행을 떠났으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자격증을 땄다. 일부러 더 분주하게 시간을 채워서 나는 백수고 지금은 공백기라는 인식을 지우려 했다.

우스운 일이지만 퇴사 후에야 시야가 더 넓어졌고 여유도 생겼다. 물론 급한 성격과 경주마 기질은 여전했지만 첫 취업 준비만큼 초조하지는 않았다. 지속 가능한 일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불쑥불쑥 고개를 드는 불안함을 잠재웠다.

스스로를 알아가려고 노력하면서, 내가 지식을 흡수하고 이를 바탕으로 블로그 포스팅이든 일기든 콘텐츠의 형식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좋아하고 반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콘텐츠 제작, 에디터 분야에 대한 흥미가 생겼다. 해당 공고들과 인스타그램 관련 계정들을 팔로우하며 체크했다. 하지만 신입을 모집하는 공고는 거의 없었고, 있다 해도 소수 인원을 뽑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중 신입을 뽑는 A사의 공고를 봤다. 출판 회사인 A사에서는 각종 원고를 교정하고 직접 글을 쓰기도 하는 에디터를 모집하고 있었다. 자격요건에 비해 내가 턱없이 부족해 보였지만 쓰고 떨어지자는 생각에 지원했다. 최선을 다해 지원서를 준비하고 면접을 봤다. 최종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두려우면서도 설렜다. 내 인생의 다음 장을 어떻게 써 내려가게 될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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