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올리브
출근도 안 하는 요즘은 알람도 다 꺼두고 나른하게 아침잠을 즐긴다. 오전 9시쯤이었나 기상 알람처럼 휴대전화 진동음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단잠을 자고 있던 터라 이른 아침부터 울린 전화가 반갑지 않았다. 반쯤 잠긴 목소리로 ‘여보세요’하고 전화를 받았는데 노동청 담당자분의 전화였다. 벌떡 일어나 앉아서 정신을 차리고 통화를 이어갔다. 접수 내용을 봤고, 모두 같은 사안이라 접수된 민원인 중 가장 연장자인 나에게 전화했다고 했다. 추가로 제출할 자료가 있으면 첨부하고, 나머지 사람들의 위임장을 받아 한 명이 대표로 진술하러 노동청에 출석하면 된다고 했다. 우리들은 이제 막 퇴사를 한 상태여서 통상 2주간은 회사에 정리 시간을 주는 듯했다. 통화를 나눈 오늘로부터 14일 이후에 방문 날짜를 잡았다.
모두들 빠르게 동의 서명을 해주었고 위임장을 취합해 제출했다. 이제 본격적인 해결의 시작을 한 것 같아 기대되는 마음도 있었다. 조금 이른 시간인 9시 반으로 출석 시간이 잡혀서 회사 출근하는 마음으로 노동청에 방문하기로 했다. 같이 가주겠다는 고마운 마음들이 있었지만, 노동청에서는 효율적인 일 처리를 위해 한 명만 대표로 출석하기를 원했다. 우연히 내가 연장자여서 임의의 대표자가 되었지만, 스스로 일 처리하는 걸 편하게 여기는 유형의 사람이라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빨리 출석하고 빠르게 처리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2주의 시간이 흐르고 출석 날이 되었다. 서로의 근황이 궁금하기도 하고 노동청 출석 이후에 내용 전달할 것들도 있을 것 같아 겸사겸사 다 같이 만나 브런치를 하기로 했다. 어째 날이 흐리더니 아침부터 비가 많이 내렸다. 우중충한 날씨와 쓸쓸한 추위가 지금의 상황을 말해주는 듯했다.
회사 소재지의 노동청을 방문하는 것이라 회사 갈 때 타던 버스와 지하철을 똑같이 탔다. 오랜만에 마주한 출근길 아침 풍경은 여전히 같았다.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 바쁘고 피곤한 얼굴을 한 그들과 한 가지 다른 점은, 나의 목적지가 노동청이라는 것이다. 지도 앱을 보며 잘 따라갔다. 살짝 긴장하여 일찍 준비하고 나온 탓에 10분 전에 도착했다. 감독관님의 이름만 알고 있으니 자리 배치표를 보고 대충 이 테이블에 맞겠거니 하고 웬 남자분께 인사드렸다. 알고 보니 옆 테이블이었다. 약간 멋쩍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신분증을 제출하고 간단한 신상을 말했다. 감독관이 조사서를 꾸미는 동안 혼자 두리번두리번하고 있었다. 뒤 테이블에서도 임금체불 회사에서의 일들을 얘기하는 게 얼핏 들려왔다. 남 일이 아니라서 왠지 모를 동질감과 언뜻 슬픈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됐다. 회사에서 정확히 어떤 업무를 했는지 물었다. 급여일과 급여를 확인했고, 급여명세서를 보며 밀린 임금을 짚었다. 월급이 밀리기 시작했을 때 대표와 얘기 나눈 바가 있는지 등을 물어봤다. 경험한 일들을 가감 없이 진술했다. 특별할 건 없었다. 쪽수로 말하면 네 명이 같은 일을 겪었으니, 증거며 자료도 우리가 훨씬 많았다. 회사도 수월하게 협조해 주는 듯하여 추가로 증거 제출할 건 없었다. 대표도 2주 후에 출석한다고 전해 들었고 별일 없이 진술 인정을 하면 진정이 취하되고 확인서를 발급받을 수 있댔다. 더 바라는 게 있느냐는 질문에 빠른 처리를 부탁드린다고 했다.
생각보다 별거 없는 진술을 끝으로 노동청을 나왔다. 이곳은 사회초년생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들이 주로 드나들었고 어르신들도 간혹 보였다. 감독관은 우리에게 이렇게 협조적인 회사를 만난 걸 좋은 사례라면서 다행으로 여기라고 했다. 물론 임금체불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비협조적인 악덕 업주도 많기야 하겠지만, 우리가 좋은 사례라고? 굳이 듣지 않아도 될 말이었다. 애초에 월급을 줄 능력이 안 됐으면서 새롭게 직원을 뽑아놓고, 나라에서 받는 제도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알쏭달쏭한 얘길 던지고, 월급을 요구할 때까지 함구하고 있던 회사와 문자 한 통으로 퇴사 통보를 하고 여태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은 대표가 좋은 경우란다. 단지 다음 주에 출석하겠다는 전화 한 통과 체불임금 확인서 같은 서류를 바로 떼주었다고 이 회사는 좋은 회사로 분류됐다. 나는 노동청이라는 곳을 노동자의 입장에서 노동을 대변해 주고 철저하게 우리를 지켜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감독관은 반복적이든 집단적이든 회사 사정이 어려우니 어쩔 수 없다고 회사 편에서 얘기했다. 이건 마치 고의로 유리잔 하나를 깬 것보다 실수로 유리잔 10잔 깬 것을 더 잘못했다고 말하는 어린아이의 도덕 실험 같은 얘기였다. 그들은 그저 사무적인 일을 도울 뿐이었다. 어떤 의도로 회사가 돌아가고 있는지는 관심 없었다. 아무도 노동자를 지켜주지 못한다. 노동자는 스스로를 항변하고 증빙자료 같은 것으로 나를 지켜야 했다.
씁쓸하고도 서글펐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우린 브런치를 먹기로 했으니까! 근처에서 보기로 했다가 브런치 가게를 찾던 중 삼청동으로 가자고 얘기가 됐다. 버스를 갈아타고 브런치 가게까지 조금 걸었다. 세찬 빗줄기도 삼청동에선 달라 보였다. 고즈넉하고 촉촉하게 이 동네를 더 빛나게 하고 있었다. 외국인들은 관광을 왔는지 길을 물어왔고 좋은 하루를 보내라며 인사했다. 덕분에 정말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좀 전의 씁쓸함을 잊어버리고 평일 브런치를 즐기는 이 하루를 만끽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만난 얼굴들은 여전히 반가웠다. 그사이 여행을 다녀온 소식도 전해 듣고, 새롭게 이직 준비하는 얘기, 집순이가 되어 쉼을 보내는 근황들을 나눴다. 맛있는 브런치를 먹으며 평범한 대화는 정말 즐거웠다. 삼청동 거리를 걷다가 전시 같은 것이 보이면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눈알을 굴렸고, 소품숍을 보면 무작정 들어가서 구석구석 구경했다. 요즘 애들처럼 스티커 사진도 찍자고 네모 부스에 들어가서는 마치 미리 맞춘 것처럼 가방 속에 책 한 권씩 들어있길래 책을 들고 까르륵 대며 추억을 박제했다. 비가 신발과 바지를 적시고 있는지도 모르고 많이 걸었다. 그러다 샐러리가 좋아하는 카페로 인도해 줬는데 골목골목 찾아 들어간 그곳에는 그녀의 말처럼 우리가 분명 좋아할 만한 것들로 가득했다. 자유롭게 읽도록 큐레이션 된 가지런한 책들, 기다란 탁자와 예쁜 의자, 미니 빔프로젝터로 감성 한 스푼, 초록으로 가득한 식물, 멋진 음악, 맛있는 커피. 창가에 돌담 뷰는 환상의 컬래버레이션이었다. 가끔 드나드는 고양이도 있었다. 특별히 고양이 러버인 파프리카는 솔-톤을 넘어선 라-톤으로 고양이를 반겼다. 이곳에서 맘에 드는 책을 한 권씩 골라 앉아서는 급작스럽게 우리의 책 기획이 시작되었다. 평소 회사에서 둘러앉았던 긴 탁자와 비슷해서 그랬는지, 한 손에 들어오는 귀여운 책을 보고 우리도 만들어 보자고 얘기가 나왔는지 정확한 시작은 모르겠지만 여기서 쿵 하면 저기서 짝하는 이들이라 가능했던 것 같다. 어떤 말을 해도 일단 적고 보는 탐구적인 사람들. 약간의 기획력과 실행력을 추가하면 나름의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노동청을 다녀와서 책 기획으로 끝낸 하루, 애석함을 또 다른 시작으로 연결해 나가는 우리가 좀 멋지다고 느껴진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