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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Feb 24. 2017

여전히, 청춘이므로.

다섯 번째, 빛바랜 푸르름에 관하여

 몇 월 며칠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있었다. 정확히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궁금한 것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더니, 급기야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고 지나는 하루가 생겼다. 몰라야 하는 것과 외면해야 할 것, 익숙해져야 하는 것들이 빈 공간에 피어나면서, 푸르를 것만 같던 내 계절은 조금씩 시들어갔다.


 한나절의 짧은 시간이 허락됐다. 해가 지기 전에 배를 타야 했던 탓에, 나는 오후 내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며 항구와 나 사이의 거리를 재야 했다. 바다와 맞닿은 작은 도시는 건물이 높지 않아 한참을 달아나도 항구가 보였다. 한 눈에도 이 근방에서 제일 근사한 것임을 알 수 있었던 회관 건물을 지나자 바다도 배도 더 이상 볼 수 없었지만, 때마침 변덕스러운 해안가 날씨가 쪽빛 속살로 나를 위로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동안 얇은 셔츠가 오월 초순의 바람을 맞아 바스락거렸다. 모르긴 몰라도 처음 봄이라는 이름이 지어지던 날도 하늘이, 바람과 공기가 아마 이랬을 것이다.


 겨우 한나절 머물다 떠나는 뜨내기에게는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모를, 그래서 마치 영원 같던 축제가 한창이었다. 대로에서 시작된 춤과 노래가 좁은 골목까지 이어졌고, 허물어진 건물의 잔해에선 고기 굽는 연기가 쉼 없이 피어올랐다. 술 향은 또 어찌나 아찔하던지. 나도 모르게 이끌려 다가갔을 뿐인데 항구 방향이며 배 시간을 깜빡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사람들은 화려한 색의 전통 복장을 차려입었는데, 어깨에 프릴 장식이 있는 드레스를 입은 꼬마 숙녀 무리들이 단연 주인공이었다. 걷고 달리기만 해도 그럴듯한 춤이 되는 신기한 옷이었다.

 그들의 축제를 감상하는 동안 나는 어떤 길에선 노래의 리듬에 맞춰 고개를 까딱였고, 어느 광장에선 고기와 술 향을 맡느라 눈을 감았다. 항구까지 걸리는 시간은 이십 분에서, 삼십 분 다시 사십 분으로 조금씩 늘어났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점점 뒤로 멀어지던 노래와 웃음소리가 제법 큰 사거리 중앙의 수풀 우거진 놀이터에 들어서자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됐다. 드레스를 입은 아이도, 술에 취해 흥얼거리는 이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 도시에서 처음 맞는 적막이었다. 나는 더 깊이 빠져들었다간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에 항구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고, 그때 한 소년의 뒷모습이 시선을 송두리째 앗아 갔다.


 넉넉한 품의 흰 셔츠에 빨간 스웨터를 멋스럽게 두르고, 빨간 양말까지 맞춰 신은 소년은 상가 건물 뒤에 숨어 고개만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종일 얼마나 열심히 달렸는지 한쪽 양말이 복숭아뼈까지 흘러내려 있었다. 골목에서 다가오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그 너머로 달려들어갈까 고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소년의 발 끝을 중심으로 길게 드리워졌다. 여행 중 하루에 한두 번쯤 마주치는, 그 자체로 눈을 뗄 수 없는 장면이었다. 궁금함, 즐거움 혹은 기대 때문인지 골목 너머를 염탐하다 몸을 돌려 완전히 감추기를 반복하는 소년.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손가락을 세워 입에 가져다 댔다. 그에게 같은 손짓으로 화답하는 동안 나는 그 작은 체구에 가득한 푸르름을 만끽하는 기분이었다. 새삼 다시 느끼는, 떠나는 것의 가치다. 그때마다 나는 비슷한 시기의 나를 떠올린다.


 서른 살, 내게도 ‘대리’라는 이름이 생긴 날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외삼촌에게나 어울리던 이름이 영 내 것 같지 않았지만 한편으로 으쓱하기도 했거든. 남들 같은 이 생활이, 언젠가 너무나도 간절했으니까. 그래서 그때쯤 어김없이 찾아온 이 세상 대리들의 공통된 고민들에도 나는 그저 버티는 것을 선택했다. 멋지게 사표를 던지는 상상을 안 할 리가 있겠냐만은, 그때 내겐 TV 드라마 속 장면으로 충분했다. 아니, 그렇다고 나를 위로했다. 늘 아닌 척했지만 일상이라는 그 이름만 낭만적인 하루들 속에서 나는 점점 겁 많은 어른이 되어있었다. 좁은 내 영역 이외의 것은 외면하는 데 익숙해져 갔다.

 사람 그리고 사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구 못지않게 아팠던 첫 번째 사람, 흩어지는 오월의 벚꽃에 ‘아, 이제 아무도 그립지 않아’라고 낮게 말하기까지 열한 번의 계절이 필요했지만, 두 번 그리고 세 번 이별이 반복되자 점점 무뎌졌고, 그 계절보다 먼저 내 마음이 식어 버리기도 했다. 나는 그것이 좋은 일이라고 믿었다. 언젠가 창에 비친 내 얼굴에 청춘이 지고 겨울이 서려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생각이 바뀌었지만.

 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은 내가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그것이 무엇이든 잃었던 것을 찾고 싶어 떠난 여행이었다. 그리고 지독히도 매서웠던 겨울 도시에서, 영하 25도의 추위에 빨간 볼로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며 떠올렸다. 언젠가 내게 청춘에 대해 묻던 누군가의 질문을. 그 날 내 답은 호기심이었다.


 가족과 함께 소년이 사라진 후에도 그 장면이 한참 동안 잔상처럼 남아서, 가까스로 배에 올라타 도시를 떠날 때까지 곱씹어야 했다. 그 후로 여행은 계속됐고 다음 또 다음 도시에서 만난 아이들이 소년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비눗방울을 향해 몸을 날리고 거리의 밴드 앞에서 그럴싸한 지휘를 하는, 그들의 호기심 혹은 장난기 가득한 눈빛과 몸짓은 청춘에 대한 변함없는 질문이기도, 여전히 청춘에 살고 있음을 확인하는 대답이기도 했다. 어느 때보다 많은 도시에 머문 그 여행에서 내가 배운 것들은 대부분 그들의 장기였다. 내게도 언젠가 그 못지않았던, 하지만 언제부턴가 잃고 또 그것조차 잊은.


 돌아온 후 몇 달이 지난 늦여름의 어느 날, 기억날 듯 말듯한 문장을 찾기 위해 책장을 한참 동안 뒤졌다. 서른에는 다시 일기를 써 보자며 마련했지만 고작 오분의 일에 멈춘 검은색 수첩. 하지만 문장마다 그 시절의 고민과 한숨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다시 읽기가 힘에 부칠 정도로. 나는 최대한 빨리 이월 어느 날에 적은 짧은 문장을 한 글자씩 번갈아 보며 옮겨 적었다. 얼마 후 내 첫 번째 책의 저자 소개에서 그 글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바닥난 통장 잔고보다 고갈되어가는 호기심이 더 걱정인 어른.’


 인생이 쓰다, 라는 탄식으로 시작된 그 책을 본 이들은 어김없이 겨울 도시의 추위, 아름다움과 함께 청춘에 대해 내게 묻는다. 나는 그때마다 소년의 뒷모습을 말과 손으로 묘사하며, 그리고 낯선 도시에서 만난 아이들의 표정을 흉내 내며 같은 답을 한다. 나는 청춘이 나이가 아닌 마음과 걸음에 있다고 믿는다고. 그래서 나는 어른이지만, 동시에 청춘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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