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즈 최고의 버거? 제가 먹어봤습니다.
버거투어 첫 번째 원정
사람의 결정이란 때때로 속을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기운 쪽을 따릅니다. 퀸즈 최고의 버거를 만든다는 발칙한 문구를 봤을 때도 그랬어요. 코웃음을 쳤지만 혹시나 하고 리스트에 추가해 뒀죠. 그럴 리가 없단 걸 알면서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자신감의 근거를요. 결국 그들의 미끼를 물어버린 것이죠.
이스트 강 건너 롱 아일랜드 시티. 버거투어 첫 원정을 떠났습니다. 맨해튼 미드타운, 다운타운에 있는 버거집만 다니기에도 80일이 짧지만 그래도 뉴욕 최고의 버거를 맛보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니까요. 코트 스퀘어 지하철 역에서 출구로 나오니 건물들도 하나같이 낮고 동네가 썰렁한 게 근교 나들이 나온 기분이었습니다. 지난 보름동안 맨해튼과 다운타운 브루클린 지역만 다녔으니 그럴 만도 했죠. 가게 오픈 시간까진 삼십 분이나 남았던 터라 근처에 있는 갠트리 플라자 주립공원(Gantry Plaza State Park)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잘 닦아 놓은 강변 산책로를 몇 분 걷지도 않았는데 기운이 쭉 빠져서 벤치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연료가 다 떨어졌던 거겠죠. 강 너머 맨해튼 스카이라인은 왜 그렇게 애틋했는지. 아름다운 시절은 그 속에 있을 땐 그것이 얼마나 예쁜지 알 수 없다고 했던가요. 소중한 존재는 떨어져 있어 봐야 그 가치를 안다고 하고요. 안 되겠습니다. 쓸데없는 생각만 떠오르는 게 빨리 배부터 채워야겠어요.
주소 : 47-18 Vernon Blvd, Long Island City, NY 11101, United States | https://maps.app.goo.gl/AfWDDjQnn9Maw9L79
메뉴 : $20 (스웨이지) / $15 (딕시)
홈페이지 : http://thebaronessbar.com/ | https://www.instagram.com/notorious_lic/
2014년 오픈해 이제 십 년을 갓 넘겼습니다. 하지만 백 년 넘은 고택이라, 낡은 가구들 덕분에 누가 봐도 꽤나 연륜 있는 식당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이전에 소개한 태번 류 식당들처럼 선술집 분위기가 물씬 풍기지만 실제로는 20여 개의 버거 메뉴를 구비해 둘 정도로 버거에 진심인 식당입니다. 거기에 뉴욕 시내 크고 작은 브루어리들의 맥주들도 취급하고 있으니 버거+맥주 조합 좋아하시는 분들에겐 구미가 당길 만한 곳이죠. 음식 외의 즐길거리들도 다수 마련해 두고 있습니다. 저녁에는 피아노 연주나 가수들의 노래, 코미디 쇼를 볼 수 있고 사브라주(Sabrage, 칼로 샴페인 병의 뚜껑을 여는 방식) 클래스에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 오손도손 모여 즐기는 모습이 영화 속 장면 같지 않을지. 그리고 그보다 더 유명한 것이 있으니 바로 이 집의 화장실입니다. 영화 타이타닉을 테마로 꾸며 놓은 이 식당의 화장실은 뉴욕에서 가장 흥미로운 화장실 베스트 5에 꼽혔다고 해요. 정작 저는 버거에 정신이 팔려서 이곳 화장실을 구경도 못 했네요. 맥주도 한 잔 다 마셨는데 말이죠. -내 방광 뒤늦게 원망해-
https://www.instagram.com/reel/C_QnYFBpwEz
퀸즈 최고의 버거집이라는 떠들썩한 광고와 달리 실상은 아늑한 동네 선술집으로 운영 중인 바로네스 바. 따로 예약 시스템 없이 방문 고객만 받고 있고 배달과 픽업 서비스 정도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평일엔 오후 네시에 문을 열어 저녁 영업만 하고 금, 토, 일요일엔 점심때부터 손님을 맞습니다. 저는 화요일 점심때 방문했는데 영업시간이 바뀌었나 봐요. 방문 후기를 보니 주말엔 종종 대기가 있지만 평일엔 걱정할 만한 정도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보단 주변에 별다른 관광지가 없다는 게 문제죠. 만약 MoMA PS1 방문할 계획이 있다거나 갠트리 플라자 주립공원에 있는 오래된 펩시 콜라 간판을 직접 보고 싶다면 이 집이 괜찮은 코스가 될 것입니다.
정오가 되자마자 첫 번째 손님으로 식당에 들어섰습니다. 붉은 조명과 나무들로 채워진 공간은 대단히 예스러워서 흡사 옛 미국 식당을 재현한 민속촌에 들어온 기분이었어요. 홀 끝에 가면 수염 덥수룩한 뚱보 사내가 손 들고 저를 반기진 않을까, 그런 상상도 해 봤고요. 오래된 실내 장식을 유지한 식당들은 많았지만 이곳은 그곳들보다 더 서민적입니다. 뉴욕판 심야식당이 있다면 이런 곳이 배경이 될 것 같아요.
정문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식사용 좌석, 오른쪽에는 술을 마시는 바가 있습니다. 긴 나무 바와 술병들에 반해서 갔다간 자칫 버거는 잊고 칵테일만 홀짝이다 갈 수도 있겠어요. 동그란 테이블은 보자마자 사내들이 커다란 맥주잔 들고 미식축구 경기를 보는 모습이 떠올랐어요. 은은한 조명이 있는 네모난 테이블에는 백발의 노인들이 앉아 칼질을 하는 모습이 제격입니다. 곳곳에는 제법 때가 탄 소품들이 놓여 있는데 제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1980~90년대의 것들이 많았습니다. 굳이 5-60년대 분위기를 연출하지 않은 게 오히려 친근해서 좋았어요. 하나하나 직접 단 듯한 크리스마스 장식들 그리고 첫 손님을 맞는 사내의 반응까지도요. 자리에 앉은 채로 휴대폰 화면과 저를 번갈아 보면서 ‘좋은 하루야, 어서 와.’라고 하는 것이 동네 식당에 온 것처럼 편안했다니까요.
볕 드는 창가에 앉으니 사내가 커다란 메뉴판을 건넸습니다. 이후로 저는 긴 고민에 빠져야 했고요. 버거의 종류가 너무 많았거든요. 선택권이 많을수록 스트레스도 커진다고 하죠. 스무 개 가까이 되는 버거들의 설명을 일일이 보는 게 힘들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이 중에 어떤 것이 퀸즈 최고의 버거인지 알 수 없는 게 답답했습니다. 물어보려 해도 사내는 진작 바에 돌아간 뒤였어요. 이럴 때 선택은 보통 둘 중 하나입니다. 시그니처 버거 아니면 가장 비싼 버거. 하지만 이 집은 그마저도 쉽지 않았고 저는 메뉴판을 정독했습니다.
아델, 셀린, 수지 큐 등 버거에는 유명한 가수의 이름이나 노래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라이브 공연을 여는 곳 다운 작명 센스입니다. 하지만 처음 온 사람에게 이렇게 불친절한 메뉴판은 없습니다. 하다못해 인기 메뉴 표시라도 해 주면 좋을 텐데요. 가장 저렴한 클래식 버거 딕시(15달러)를 주문하려다 아무래도 구성이 부실해서 더블 패티의 스매시 버거 스웨이지(20달러)를 주문했습니다. 햄버거 아메리카(https://brunch.co.kr/@mistyfriday/221),7번가 버거(https://brunch.co.kr/@mistyfriday/231) 등을 거치며 한창 뉴욕식 스매시 버거에 빠져있었거든요. 거기에 맥주를 한 잔. 보통 가게 분위기나 뷰를 보고 술을 주문하는 편인데 이 집은 술을 부르는 쪽이었어요. 그리고 또 하나, 이 집의 메뉴 가격은 현금 기준으로 카드로 결제하면 약 3%의 수수료가 붙어요.
금빛 맥주 한 잔이 먼저 그리고 나중에 버거가 나왔습니다. 핀이나 막대 대신 칼로 푹 찔러 버거를 고정한 게 무심한 듯 멋져 보였습니다. 버거를 주문하면 샐러드와 감자튀김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는데 양이 많진 않습니다. 맥도널드의 세트 메뉴에 있는 감자튀김과 비슷한 수준인데 그간 미국의 감자 인심이 남달랐던 터라 야박하게 보이더라고요.
스웨이지 버거의 구성은 스매시 버거와 BLT의 요소들을 합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납작하게 눌러 바삭하게 구운 스매시 패티에 쫄깃한 식감의 감자 번, 구운 양파, 피클, 아메리칸 치즈까지 전형적인 스매시 버거를 바탕에 두고 토마토와 베이컨, 양상추를 넣었습니다. 양쪽 다 검증된 조합이지만 둘을 합쳤을 때의 결과는 쉽게 예측할 수 없겠죠. 누군가에겐 끔찍한 혼종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꽂혀 있던 칼을 빼서 버거를 반으로 자르고 한 입 크게 베어 물었습니다. 많은 재료가 들어간 버거인 만큼 식감부터 다채롭습니다. 스매시 버거에 없는 아삭, 바삭한 식감들이 더해진 게 일단 기분을 좋게 하더군요. 역시나 베이스는 스매시 버거입니다. 다른 가게의 버거들에서도 느꼈지만 스매시 패티의 존재감이란 실로 대단해서 다른 재료들이 바뀌어도 스매시 버거로 느껴집니다. 게다가 패티가 두 장이니까요. 일반적인 스매시 버거와 다른 점이라면 신선 채소들이 기름진 맛을 잡아준다는 것. 우려했던 스매시+BLT 조합은 제 취향에는 잘 맞았습니다. 느끼한 스매시 버거의 단점을 보완해 주면서 한결 건강한 음식을 먹는다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배도 좀 더 부를 테고요.
하지만 조리 등 디테일에서 아쉬운 점이 몇 있었습니다. 핵심인 스매시 패티의 굽기가 섬세하지 못한 게 가장 아쉬웠어요. 사진 속 단면을 보면 알겠지만 속까지 바짝 익어서 식감이 다소 퍽퍽했습니다. 반면에 치즈는 충분히 녹지 못했어요. 스매시 버거 전문점에 비해 부족한 점입니다. 육향이나 기름기도 부족했고요. 감자 번을 굽지 않은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따뜻해야 쫀득한 식감이며 고소한 맛이 배가되는데 말이에요. 비법 소스는 그 구성을 잘 알 수 없지만 강한 인상을 주지 못했습니다. 좋게 말하면 잘 어우러진, 반대로 말하면 특별하지 못한 것이겠죠. 창의적인 시도는 좋았지만 완성도가 떨어진 버거였습니다.
감자튀김이 포함된 더블 패티 버거와 맥주 한 잔을 먹고 세금 포함 5만 원이 조금 넘는 값을 지불했습니다. 가격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만 이 돈이면 햄버거 아메리카의 더블 스매시 버거 두 개를 먹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사내는 마지막 인사와 함께 내일 저녁 코미디 공연이 있다고 말했고 저는 괜한 호들갑을 떨며 그때 오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가지 않았죠.
첫 번째 손님이라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걸까, 스매시 버거 전문점이 아니니 그랬을 수 있지. 진짜 에이스는 따로 있을 거야. 퀸즈 최고의 버거집을 나와 강변 산책로를 걸으며 누굴 위한 것인지 모를 위로를 떠올려 봤습니다. 메뉴판에 있는 다른 버거들 역시 창의적인 것들이 많았기에 다시 방문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뉴욕이 너무 넓은 걸요. 당장 그날도 퀸즈 원정 나온다고 저녁에 방문할 버거집을 전날 점찍어 뒀고요. 그래도 그날 이후 버거 투어의 배경이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 할렘으로 점점 넓어졌으니 처음이자 유일한 퀸즈 버거집으로 의미를 두기로 했습니다. 가만있어 보자, 그렇다면 결국 제 퀸즈 최고의 버거집이 이 집이 되는 거잖아요? 이거 뭔가 당한 기분인데요.
번 : ★★☆
패티 : ★★☆
구성 : ★★★☆
가격 : ★★★
분위기 : ★★★☆
퀸즈 최고의 버거라는 말에는 기가 막힌 라이브 공연을 보면서 먹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을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