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커튼 너머로 펼쳐지는 뉴욕 바이브
버거는 모르겠고 지금 여기 있는 게 너무 좋아.
센트럴파크에 밤이 찾아왔습니다. 푸르른 풍경이 조금씩 빛을 잃다 이내 어둠에 잠겼고 깔깔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어느새 사라졌어요. 공원이 잠을 청하는 사이 도시의 주도권은 환하게 불 밝힌 건물들과 거리로 넘어갑니다. 이래서 도무지 잠들지 않는 도시라고, 그렇게 노래 부르나 봅니다. 일찌감치 바위 언덕에 앉아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저도 즐겨 보던 드라마 속 대사 하나를 절로 읊게 되더군요. “배가.. 고프다.”
가까운 버거집을 찾았습니다. 마침 세 블록 거리에 점찍어 뒀던 식당이 있었어요. 구글 맵 후기의 사진들을 보고 허름한 동네 버거집이겠거니 했는데 주소지에 도착하니 웬걸, 번듯한 호텔이 있는 것 아니겠어요? 게다가 로비엔 어둑어둑한 라운지 바뿐이었습니다. 버거집이 있을 분위기가 아닌데,라고 중얼거리며 1층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좁은 복도에 들어섰다가 화장실 문 보고 발길을 돌렸고, 라운지 바를 가로질러갔다가 건물 밖으로 내뱉어졌습니다. “여기에 혹시 버거집이 있습니까?” 제 질문에 라운지 직원은 손가락으로 홀 끝에 있는 계단을 가리켰습니다. 별다른 표식도 없는 데다 커튼으로 가려 놓아서 주방이 있겠거니 했던 곳이었어요. 반신반의하며 계단을 오르는 동안 가장 먼저 구수한 고기 냄새가 났고 다음으로 기름 끓는 소리와 힙합 비트가 들렸습니다. 마침내 빨간 커튼 사이 풍경을 보았을 땐 웃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화려한 그래피티와 덕지덕지 붙은 스티커들. 브루클린 뒷골목에나 있을 법한 힙한 분위기의 버거집이 있었거든요. 바깥 라운지와 너무나도 상반된 분위기라 꼭 포털을 타고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멋진 뷰, 근사한 인테리어로 치장한 집들은 많았지만 그 어떤 곳도 이만큼 황홀한 경험을 주진 못했어요.
주소 : 119 W 56th St, New York, NY 10019, United States (Thompson Central Park 점) | https://maps.app.goo.gl/fpU7vECPKcLvkK2H6
메뉴 : $13.5 (치즈버거) / $20.5 (더블 치즈버거)
홈페이지 : https://www.burgerjointny.com/ | https://www.instagram.com/burgerjoint_nyc/
2002년 르 파커 메르디앙(Le Parker Meridien) 호텔에서 시작한 버거 전문점입니다. 로비 안쪽의 비밀 공간에서 별다른 간판도 없이, 이름도 그저 ‘버거집’으로 시작한 식당이 맨해튼 전체에서 손꼽히는 버거집이 됐단 건 그만큼 맛이 있단 거겠죠. 호텔은 톰슨 센트럴 파크로 이름을 바꿨지만 버거집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영업 중이고 식사 시간이면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줄을 섭니다. 사람들은 이 집의 가장 큰 매력으로 버거를 꼽겠지만 저는 호텔 레스토랑에 대한 상식을 깨는 자유 분방한 분위기를 더 높게 쳐요. 60층 뷰의 화려한 레스토랑 맨하타(https://brunch.co.kr/@mistyfriday/225)를 가장 뉴욕 스러운 식당으로 꼽았지만 버거 조인트 역시 또 다른 의미로 뉴욕 바이브 충만한 버거집입니다. 맨해튼에 두 곳, 브루클린에 한 곳의 점포를 운영 중인데 규모나 역사성을 볼 때 역시 톰슨 호텔에 있는 본점을 방문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비밀 공간으로 시작한 식당인 만큼 예약 시스템이 없으니 대기가 긴 주말, 식사 시간대를 피하시는 게 좋겠어요.
센트럴파크와 6번가를 끼고 있는 이 버거집의 위치는 매우 좋습니다. 맨해튼 미드타운을 구경하다 언제든 갈 수 있으니까요. 근사한 호텔 안에 있지만 분위기는 영락없는 뒷골목 식당이라는 것도 재미있잖아요. 공간이 주는 즐거움이 상당해서 베스트 버거집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곳이 됐습니다. 실제로 추천을 구한 일행과 함께 방문한 적도 있어요. 로비에서 두리번거리는 그에게 호텔 직원이 했던 것처럼 빨간 커튼을 가리켰습니다. 역시나 그도 계단을 오르며 우와, 하고 감탄사를 내뱉더군요.
톰슨 호텔 로비 구석에 숨겨져 있는 이 비밀 공간은 창문 하나 없이 어둑어둑해서 꼭 지하에 있는 식당이나 펍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2002년 오픈 때부터 계속 덧쓰여졌을 낙서와 그림 그리고 스티커에선 세월과 연륜이 느껴져요. 지저분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누구도 지우거나 떼어내길 원치 않을 겁니다. 낡은 가구들도 그렇습니다. 이 안에 매끈한 새 테이블과 의자가 있으면 얼마나 어색하겠어요. 이것들이 다 모여야 이 바이브가 완성되는 거죠. 내부 공간이 꽤 넓고 테이블 수도 많지만 주말이면 홀이 가득 차고 줄까지 선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 집이 음식 조리 시간이 다른 곳보다 꽤 긴 편입니다. 그만큼 조리 과정이나 재료에 신경을 쓴다고 볼 수도 있지만 줄 서 있는 입장에선 답답할 수 있죠. 저는 오픈 시간에 맞춰 또는 저녁 시간 이후에 가서 특별히 기다리지 않고 식사했습니다. 그리고 먹는 동안 여기 앉아 있는 게 좋단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다지 특별한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데 뭐가 그리 좋았는지. 대강 뜯은 박스 안쪽에 손글씨와 그림으로 만든 메뉴판은 왜 그렇게 사랑스러웠는지. 처음 빨간 커튼 안에 들어섰을 때의 강렬함이 그렇게나 컸나 봅니다.
이런저런 기교 부리지 않고 클래식 버거만 판매하고 있습니다. 기본 햄버거가 12.25달러, 치즈버거가 13.5달러입니다. 패티가 두 개인 더블 햄버거(18달러)와 더블 치즈버거(20.5달러)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비건을 위한 비욘드 버거를 구비해 놓은 것도 눈에 띕니다. 대부분의 식당들이 세금을 제외한 음식 값을 메뉴판에 기재한 것과 달리 이곳의 가격은 세금이 포함된 것입니다. 13.5달러의 치즈 버거를 다른 식당의 버거와 비교하려면 12달러 정도로 계산해야 하니 비싼 가격은 아닙니다. 팁은 카운터에 있는 팁 박스에 현금으로 내는 것이 원칙이고요.
버거를 주문할 때는 종류와 함께 패티 굽기와 속재료를 선택합니다. 속재료는 상추, 토마토, 생양파, 피클이 기본이고 베이컨이나 구운 양파, 버섯, 소스 등을 유료로 추가할 수 있습니다. 별다른 콤보 또는 세트 메뉴가 없으니 음료와 사이드 메뉴는 따로 주문하면 됩니다. 8.5달러짜리 프렌치프라이는 두 사람이 먹기에도 충분한 양이니 인원수대로 주문하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탄산음료, 밀크셰이크, 맥주 그리고 와인까지 마실 것도 다양합니다. 버거에 와인이라.. 어울릴까요?
첫 방문 때는 치즈 버거 단품을, 두 번째 방문 때는 더블 치즈버거에 프렌치프라이, 진저에일을 주문했습니다. 사이드에 음료까지 먹으면 30달러가 훌쩍 넘어가죠. 비싼 집이 아닌 데도 이 정도니 역시 뉴욕 물가가 대단하다 할 수밖에요.
싱글 치즈거버인데도 종이로 싼 버거가 두툼하고 묵직한 것이 먹기 전부터 기대가 됩니다. 포장을 벗기니 적당히 녹은 치즈가 이미 빵까지 흘러내려 있습니다. 제 경우엔 이 녹은 치즈를 볼 때 식욕이 폭발하는 것 같아요.
접시 위에 놓은 버거의 모습은 전형적인 클래식 치즈버거입니다. 겉면을 살짝 구운 화이트 번 사이로 두툼한 패티와 노란 체다 치즈가 있고 그 위로 적양파와 생 토마토, 피클 그리고 양상추가 있습니다. 뉴욕에서 먹었던 다른 버거들보다 신선 채소의 비중이 높은 것이 이 집의 특징이자 장점입니다. 그래봐야 양파와 토마토를 신선한 상태로 썼고 양상추가 추가된 정도지만요. 아쉬운 것은 피클입니다. 원래 싫어하기도 하지만 눈으로 보기에도 기성 제품이라 빼고 먹었어요. 그래도 채소가 많아서 괜찮습니다.
사진으로 보기에도 꽤나 두꺼워 보이죠. 특히 10 온스 가까이 돼 보이는 패티의 존재감이 독보적입니다. 두 번째 방문 때는 더블 치즈버거를 주문했는데 안 그래도 두꺼운 패티가 두 장 들어가니 한 입에 무는 것은 고사하고 손으로 잡고 있기도 버겁더군요. 웬만큼 잘 드시는 분 아니면 싱글 치즈버거로도 충분할 겁니다. 고기 러버라면 더블 치즈버거를 굽기 미디엄으로 시켜 보세요. 빵은 손잡이, 채소는 들러리에 불과한 식사가 될 거예요.
한 입 크게 벌려 앙 베어 무니 이 버거는 식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파삭하고 깨지는 빵의 겉면부터 아사삭 씹히는 양상추, 채즙이 입 안에 쭉 스며드는 토마토, 피클까지. 다채로운 식감들의 조화에 입과 귀가 즐겁습니다. 늘 말하지만 뉴욕에서 이렇게 채소 많은 버거가 드물었어요. 그리고 마침내 패티와 치즈의 앙상블이 펼쳐집니다. 뉴욕에서 버거 먹으면서 느낀 것들 중 하나는 치즈와 패티를 하나처럼 여기는 치즈버거의 철학입니다. 녹은 치즈가 패티에 엉겨 붙으며 풍미와 식감을 살리는 것이 뉴욕 버거들의 공통된 즐거움이었거든요. 미디엄 굽기의 패티는 안쪽이 붉게 보일 정도로 덜 익었는데 적당한 육향에 식감도 부드러워서 먹기 좋았습니다. 두 번째 방문에선 더블 치즈버거를 웰던 굽기로 주문했는데 고기가 뻑뻑해서 첫 방문 때보다 맛이 덜하더군요. 패티가 덜 익은 것에 거부감이 생길 수 있겠습니다만 제 추천은 미디엄입니다. 좋은 등급의 고기 대신 이 가격대에 맞는 적당한 고기를 먹기 좋게 잘 조리했습니다. 잡내도 없었고 그릴에 구워 불향도 제법 났어요.
기본에 충실한 치즈버거 레시피라 그런지 소스도 특제 소스 대신 케첩과 마요네즈를 썼습니다. 한 입 두 입 먹으면서 이 친숙함이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아, 버거킹 와퍼였습니다. 재료 조합에 불향까지 아주 고급스럽게 만든 와퍼에 비유할 수 있겠네요. 그래서인지 함께 간 일행은 다녀 본 집들 중 이 집 버거가 가장 맛있다고 했습니다. 제겐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만 그만큼 호불호 없이 누구나 먹기 좋은 버거라는 뜻 아닐까요. 뉴욕 사람들이 스매시 버거를 좋아한다지만 클래식은 영원하잖아요.
57곳의 버거집들 중 세 번 방문한 집은 버거 조인트가 유일했어요. 버거가 가장 맛있어서? 그건 아닙니다. 마치 나만 아는 것 같은 비밀스러운 공간과 적당히 잘 만든 클래식 치즈버거. 그 둘의 조합이 마음에 들었어요. 아, 식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 펼쳐진 라운지의 재즈 밴드 공연도 이 날 식사를 좋은 기억으로 만들어 줬고요. 마침 크리스마스 시즌이었거든요. 이날 집에 돌아가면서 아이폰에 적어 둔 메모로 총평을 대신합니다.
이런 호텔 식당이라면 매일 올 수 있겠다.
번 : ★★☆
패티 : ★★★
구성 : ★★★★
가격 : ★★★☆
분위기 : ★★★★☆
뉴욕 맨해튼에서 20년 영업 중인 간판 없는 식당. 이건 무조건 맛집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