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종사관 정경달
13. 종사관(從事官) 정경달(丁景達)
이순신장군의 참모 중에 드물게 문과 급제자이다.
군수참모의 역할을 수행했다.
초기에 이순신 막하에 들은 것은 아니고 충무공이 1593년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각 수영을 지휘하게 되자 조정에 보고할 문서작성과 보급품을 챙기고 둔전을 경영하여 식량을 조달할 수 있는 문관을 원해서 당시 고향인 장흥에 내려와 있던 정경달을 직접 종사관으로 임명해 달라고 조정에 청해서 배속받은 인물이다.
<請以文臣差從事官狀> 李忠武公全書卷之三 만력21년(1593년) 윤11월 17일
문신으로서 종사관을 임명해 주시기를 청하는 장계
臣旣兼統制之任。三道水兵將官。皆在部下。檢飭措制之事。非止一再。而臣在嶺海。文移遠道。許多兵務。趁未擧行。都元帥,廵察使所駐處。就議定奪者亦多有之。而相距隔遠。或未及期限。事事乖方。極爲可慮。(신이 이미 통제사의 임무를 겸하게 되어 삼도 수군의 장수들과 군사들이 모두 신의 통솔하에 있게 되니 감독하고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신은 영남의 바다 위에 있으므로 글로써만 먼 길에 연락하기 때문에 허다한 군사 업무가 그에 따라 다 시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도원수와 순찰사가 있는 곳에 가서 결재 받아야 할 일도 많은데, 서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가끔 기한에 미치지 못하여 일마다 어긋나게 되니 그지없이 염려가 됩니다.)
臣之妄意。文官一貟。依廵邊使例。從事官稱號。往來通議。所屬沿海列邑廵檢措置。射格軍粮連續調入。則將來大事。庶濟萬一。諸島牧塲閑曠之地耕墾處。亦有審檢之事。故妄料敢稟。伏願朝廷十分商量。若於事體無妨。則長興居前府使丁景達。時在本家云。特命差下(신의 혼자 생각에는, 문관 한 사람을 순변사의 예에 따라 종사관이란 이름으로 두어서 왕래하면서 업무를 논의하게 하고, 소속 연해안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니며 감시하고 일을 처리하게 하며, 사부와 격군의 충원과 군량 조달의 업무를 지속적으로 맡게 한다면, 앞으로 닥칠 큰일을 만분의 하나라도 치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섬에 비어 있는 목장으로 농사지을 만한 땅이 있는 것을 조사해 보아야겠으므로 이에 감히 품의 올리오니, 조정에서는 부디 충분히 헤아리시어 만일 사리와 조정의 체모에 무방하다면, 장흥 사는 전 부사 정경달(丁景達)이 지금 자기 집에서 쉬고 있다고 하니, 특별히 뽑아 임명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통제사도 이때 처음 신설된 직책이고 통제사 종사관도 이때 만들어진 직위이다. 정경달이 통제사 1호 종사관인 셈이다.
그는 종사관이 되어 문서업무, 징병, 보급조달, 명 장수들과의 소통 등을 담당했다.
충무공이 정경달을 제청한 주 이유는 둔전(屯田)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당시 조정으로부터 보급품을 지원받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라 남해에 버려진 빈 섬들을 활용해 직접 보급을 충당하려던 충무공의 계획에 정경달은 적임자였다. 그것은 선산부사로서 정경달이 상당한 업무능력을 보여준 것이 충무공에게도 알려졌으리라 짐작된다.
정경달은 1542년(중종 37)생으로 충무공보다는 세 살 위다.
이순신장군이 답답한 일이 있을 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 몇 안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마 문과급제자에 선산부사(종3품)를 지낸 고위직 출신이라 전술이나 작전등을 논의하기에 가장 적당한 인물일 것이다.
충무공도 문과준비를 하다 무과로 전환한 경우이니 문과급제자에 대한 존중과 아무리 문과급제자일지라도 인품이 모자라면 충무공이 존중할 리 없으니 정경달의 면모를 짐작하게 한다.
난중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갑오년(1594년) 2월 28일 “종사관(정경달)과 더불어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와 같이 하루 종일 얘기를 나눌 만한 인물이었다.
정경달의 본관은 영성(靈城)으로 자는 이회(而晦), 호는 반곡(盤谷)이다.
아버지는 하급관리로 참봉인 정몽응(丁夢鷹)이다.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병과 20위로 급제하였다.
후대의 학자인 성해응이 쓴 독부충의전(督府忠義傳 이순신장군의 막하)에 의하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산부사로 있던 그는 가장 먼저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마련해 전쟁에 대비했다. 당시 감사 김성일, 병사 조대곤과 뜻을 모아 치밀한 전략을 세웠고, 그 결과 금오산 일대에서 왜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며 지역 방어의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
전황이 더욱 격화되던 갑오년, 통제사 이순신은 정경달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를 종사관으로 발탁했다. 정경달은 각 주와 현에 군사 지휘 기구인 도청을 설치해 방어 체계를 정비했고, 이는 왜군의 침입에 대비한 중요한 조치였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통정대부로 승진했다.
그러나 전쟁 중의 공훈만큼이나 정경달의 인품이 드러난 순간은 이순신이 위기에 몰렸을 때였다. 통제사 이순신은 원균의 모함으로 체포될 처지에 놓였다. 조정이 흔들리던 그때, 정경달은 침묵하지 않았다. 그는 임금 앞에서 이순신을 두둔하며 단호히 말하였다.
”이순신은 나라를 향한 충성과 적을 막아내는 능력에서 예로부터 비길 사람이 없는 인물이며, 전황을 냉정하게 살피고 형세를 판단하는 능력 또한 병법에서 가장 뛰어난 장점이라고 했다. 일시적으로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죄인으로 몰아서는 안 되며, 만약 그를 죽인다면 나라의 근본인 사직이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순신장군이 위기에 몰렸을 때, 자칫하면 본인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상관을 위하여 이 정도로 변호할 수 있다는 것은 올바른 가치에 대한 확고한 정립과 강단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토록 충무공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참모였던 것이다.
<방어와 수비에 대하여 마땅히 조치해야 할 일을 계함> 을미년(1595, 선조28)
서애선생문집 제8권 계사(啓辭) 西厓 柳成龍著
신은 오래도록 병으로 혼미한 속에 묻혀 바깥 일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병석에서 조용히 생각해 보니, 왜적들의 모략은 측량하기 어렵고 봄소식은 날로 다가오는데, 한심한 일이 한둘이 아닙니다.
삼가 생각이 미치는 몇 가지 조목을 혼미함을 무릅쓰고 아뢰자니 말에 두서가 없습니다. 그러나 삼가 바라건대, 비변사에 명을 내려 시행할 만한 것은 가려 시행케 하소서. 말단에서 사람을 쓰고 일을 하며 민성을 듣는 것 등은 자못 대체에도 관계되니, 성상께서는 유념하시어 채택하소서.
中略
전라도 연해의 군현이 모두 탕진됐다 하지만, 광주ㆍ나주 같은 대읍의 창고 곡식은 아직 남은 저축이 있고, 지난가을에 거둬들인 환곡[還上]도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통제사 이순신ㆍ종사관 정경달(丁景達)로 하여금 맡게 해서 순찰사에게 알리고, 배를 동원해서 급히 1, 2천 석을 풀어 그들을 구제한다면 군졸들은 몇 달 동안 연명할 수 있습니다.
그후에는 둔전에서 양곡 생산하는 일에 더한층 진력하여 군량을 이어 나갈 계획을 삼아야 합니다. 유유히 날짜만 보내다가 또다시 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지난해에 이순신이 올린 장계에 정경달을 시켜 둔전을 하였다 했는데 그 소출이 얼마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금년 둔전도 그대로 정경달에게 시켜 진력하여 조치케 하고, 근처의 감목관 나덕준(羅德峻) 등에게 작년에 소출한 곡물을 함께 받아들여 종자를 삼아 한산도 근처에 경작할 만한 땅이 있으면, 싸움이 없는 여가에 초소 근무 군사를 열씩 또는 다섯씩 짝을 지워 기장ㆍ차조ㆍ콩ㆍ조를 많이 심게 합니다. 그리고 해변의 경작할 만한 기름진 땅에 편리한 시설을 많이 해서 왜적들에게 포로되었다가 도망해 나온 사람이나 또는 영남 지방의 실업자들을 모으면 모두 농군이 되니 경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경달이 이 일을 잘 해낼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사변 초에 정경달은 선산 부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경토를 떠나지 않았고 꽤 군공이 있으니, 약해서 책임을 이기지 못할 무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이순신 군중에는 이미 종사관 심원하(沈源河)가 있으니, 정경달 이 비록 둔전 일에 전임해서 그 성과를 책임지게 하는 것이 실로 무방하겠습니다.
이러한 뜻으로 순찰사 홍세공(洪世恭)과 이순신(李舜臣) 등에게 급히 유시를 내리심이 어떻겠습니까?
후세에 다산 정약용이 “반곡(盤谷) 정공(丁公)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제함 ”이라는 글에서 선산부사 정경달(丁景達)이 그가 군사를 징발할 때는 사운(四運)의 법을 설치하고, 적을 방어함에 있어서는 사채(四寨)의 장수를 두는 등 그 임기응변은 그와 같이 기묘(奇妙)하였으면서도 임진왜란이 나던 4월 15일 이전에는 손가락 하나 못 놀리고 털 하나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은 위에서 싫어하는 것을 아래에서 감히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라고 썼다.
정약용이 인정할 정도로 정경달은 행정과 병법의 달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還陣狀[二]> 李忠武公全書
謹啓爲還陣事。前加造船射格軍。欲親按整理。姑還本道緣由馳啓後。去十二月十二日。
(진으로 돌아가는 일을 아룁니다. 저번에 더 만드는 전선의 사부와 격군들을 직접 보살펴 정리해야 하겠다는 일로 잠깐 이 지방으로 돌아가는 사유를 들어 장계한 뒤에, 지난 12월 12일 이 지방으로 돌아와 검사도 하고 신칙하였습니다.)
中略
全羅右道。則臣使從事官丁景達。廵檢整飭。馳送于右水使李億祺期會處。臣所屬各官浦戰船。艱難整齊。今正月十七日。還向陣中。(전라우도는 신의 종사관 정경달(丁景達)을 시켜 순검하고 정비하도록 신칙하였으며, 우수사 이억기와 약속한 곳으로 달려 보냈습니다. 신에게 소속된 각 고을과 포구의 전선을 겨우 어렵게 정비하여 오늘 1월 17일 진중을 향하여 돌아가겠습니다,)
전쟁 중에 남원부사에 제수되었다가 1602년 선조 35년에 죽는다.
정경달도 [난중일기]를 썼다고 하는데 아직 읽진 못하여 어떠한 내용인지는 모르나
충무공의 난중일기와는 다른 참모로서의 시각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선무공신이훈에 책봉되었으며 후에 예조참의에 증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