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롬멜 장군
롬멜將軍
롬멜 장군은 독일군에게는 신화다.
일정 부분 과장되었고 일정 부분 진실이다.
난 예전부터 장군의 일대기에 관심이 많았다.
삼국지에 나오는 정규군이든
수호지에 나오는 게릴라든
리더에 대한 관심은 유별났다.
그런데 내 적성에 맞는 일을 한 적이 있다.
군에 입대해서 나한테 주어진 첫 번째 일은
대대장이 제임스 클라크장군의 "다뉴브에서 압록까지"라는
두툼한 책 한 권을 요약해 자기한테 달라는 거였다.
일요일을 포함해 한 사흘 6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책을 요약해
대대장에게 주었는데 모두들 고역이라 생각했지만
난 엄청 즐거웠다.
제임스 클라크장군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한국전에도 참전했던 미국의 육군 대장이다.
그 이후 대대장이 계속 원했던 것은
6.25 전쟁의 戰史를 읽고 자기한테 요약해 달라는 것이었다.
난 수십 권이 넘는 전투일지를 읽고
요약하는 일을 했다.
소대 전투에서 연대전투까지 아주 자잘한 전투까지도 거의 읽었다.
대대장은 그 후 육군대학에 입학했다.
아마 내가 만든 요약본이 참고자료였던것 같다.
그 후 회사에 입사해서도 戰史에 대한 관심이 많아
정승화장군 자서전, 백선엽장군 자서전,
베트남 지압장군 전기, 넬슨제독평전, 제갈량평전, 강희제평전,
패튼장군, 정병주장군, 김종서 장군, 이순신장군, 원균정전등
지휘관들의 일대기를 많이 읽었고
2차세계대전사나, 스탈린글라드전투, 독.러전쟁사, 태평양전쟁사,
벌지전투, 미드웨이해전, 진주만 등 많은 전쟁사를 읽었다.
각설하고,
에르빈 롬멜은 1891년에
알렌지방의 고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와
귀족출신의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 났다.
그다지 특별한 재능이 없는 젊은이인 롬멜은
군인이 되는 길을 택했고 군사학교에 진학했다.
군사학교 생도 시절
신교도인 롬멜은 가톨릭인 귀족의 딸 발브르가 슈템머와 사랑에 빠지고
둘은 1913년 딸을 출산한다. 사생아였다.
둘은 집안의 반대와 여러 가지 이유로
끝내 결혼하지 못하고
롬멜은 1차 세계대전에 소위로 참전한다.
그는 1917년 적국인 이탈리아와의 전쟁중
알프스에서 엄청난 무공을 세운다.
이 공으로 철십자훈장을 받지만 우여곡절이 많았다.
공은 롬멜이 세웠지만 철십자훈장은 귀족출신의 다른 사람에게
넘어 가고 그는 오랜 시간 투쟁한 끝에 나중에 받게 된다.
이 사건이 그의 일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때부터 자기 PR에 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어쨌든 그는 1차 세계대전중에 대위로 진급하고 종전을 맞는다.
종전 후 그는 소령으로 군사학교 교장이 되고
거기서 많은 훈련생도들로 부터 존경받는 교관이 된다.
이때쯤 히틀러를 만났는데
롬멜은 그의 매력에 빠져
그에게 경도된 거 같다.
그는 1939년 장군이 된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초기 그는
독일 "장갑차의 아버지"라 불리는 구데리안장군 휘하의
제7 전차사단의 사단장이 되고 엄청난 전공을 세운다.
마지노선을 최초로 돌파한 독일군 장군이 된다.
이 공으로 그는 또 다시 철십자훈장을 받게 된다.
이때만해도 롬멜은 수많은 독일군 장군 중의 하나였다.
히틀러가 그다지 중시하지 않은 야전장군 중의 한 명이었다.
독일은 기갑부대를 선택과 집중을 통해
"전격전"의 개념을 도입했다.
사실, 독, 불 전쟁 초기 전차수는 양측이 비슷했으나
프랑스는 전차를 사단마다 30-40대씩 산개해
일렬로 전선에 늘어뜨렸고
독일은 200-250대의 전차를 한 곳에, 한 시점에
투입함으로써 기갑전에서 압도했다.
독일군의 진격속도가 워낙 빨라 후퇴하는 프랑스군 보병보다
일주일 정도 앞서 진격했다고 한다.
독일 기갑부대의 유명한 장군으로는
앞서 말한 구데리안 장군과
만슈타인장군이 있었다.
롬멜은 이 두 장군의 명성에는 한참 못 미치는 신참 기갑사단장이었다.
그러나 1942년 롬멜이 중장 진급과 동시에
북아프리카전선에 투입되면서 그는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명장의 반열에 오를 기회를 잡는다.
당시 북아프리카는 히틀러에게는 계륵같은 존재였다.
동맹국인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카이사르를 꿈꾸며 기세좋게
북아프리카에 진격했지만 늪에 빠진 꼴이 되었고
히틀러는 동맹국으로서 어쩔 수 없이 참전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관심은 온통 스탈린글라드였다.
해서 적당히 싸우다 빠질 명분이 필요했고
이 때 적임자로 롬멜이 눈에 띈 것이다.
롬멜은 중장진급과 함께 북아프리카로 갔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큰 전과를 올렸다.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시대를 앞선 독일 장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토브룩을 함락시켰지만 독일군의 치명적 약점은 보급문제였다.
전차도 부족하고 연료도 부족하고 병력도 부족했다.
오로지 롬멜의 전략 하나로 버티었지만
한계에 도달했다.
독일이 지중해의 몰타섬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
전략적으로 독일군의 재앙이 되었다.
"히틀러는 왜 세계정복에 실패하였는가?"라는 책에서
히틀러의 전략적 실수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크레타섬에
최정예 공수부대를 투입했다가 많은 손실을 입고서야
점령한 사건을 주요 변수로 다루고 있다.
미술학도였던 히틀러가 문화적 허영으로 크레타섬에 올인해서
많은 희생을 치루고서야 점령했다고 책에서는 말한다.
이때 꽤 많은 공수부대원이 죽고
히틀러는 공수부대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롬멜에 더 많은 병력을 지원해 줘서
북아프리카 전선을 장악하고 이집트를 점령해서
장기전으로 갔다면 히틀러에게도
승산이 있었을 거라고 분석한다.
주요 변수는 스탈린그라드이지만 북아프리카전선도
변수가 될 수 있었단 점을 히틀러는 간과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이 있지만 독일 선전상 괴벨스는
롬멜을 독일의 희망으로 포장했다.
구국의 영웅, 롬멜.
이렇게 신화는 덧칠을 한다.
러시아전선의 패퇴를 덮을 선전수단으로서 롬멜이 등장했고
영웅으로 부각될 수 있는 아주 좋은 자질을 롬멜은 갖고 있었다.
사실 영국군은 독일전력의 3배 정도.
영국군 장군이 유능했다면 대적이 안 될 정도 였지만
무능으로 인해 그렇게 오랫동안 롬멜이 버틸 수 있었다.
전차의 성능도 독일의 최강인 타이거 전차는
수가 얼마 되지 않았고 구형이 훨씬 많았다.
그나마 후반에는 지원이 없어 40대 가량의 전차만 남아 있었다.
특히 미국이 참전해 셔먼탱크가 등장하면서
기갑전에서 독일이 이길 기회는 없었다.
롬멜이 대공포인 88mm를 대전차포로 응용하면서
전력의 불균형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었다.
롬멜이 유능하고 뛰어난 장군은 틀림없으나
알렉산더나 카이사르, 한니발에 비교하기는 거리가 있다.
보급이나 지원이 충분했었다면 달라질 수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독일이 영국에 패한 전투이니
롬멜이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롬멜은 유능한 장군임에 틀림없지만
신화는 신화일뿐이지 명장으로 부를 수는 있을까?
그리고 名將의 기준은 뭐지?
알렉산더,
카이사르,
한니발,
이순신,
나폴레옹,
넬슨,
이 정도 돼야 명장으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롬멜장군은 억울하다.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었는데
지원이 미흡했다.
자기 능력을 최대로 발휘한 건가,
아님 기회가 없었나?
롬멜은 억울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