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고통의 크기는 남을 돌 볼 수 있는 상태가 되지 않았다. 남편도 , 아이도, 나 자신도 돌아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야 나는 상담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끝이 있기는 할 테지만 그 끝을 이것저것 다 볼 거 보고 끝을 보다가 다들 수명이 이만큼은 줄어 있을 거 같았다.
명줄이 붙어 있는 것도 괴롭다 싶은 지경이 되어서야 우리는 썩은 동아줄인지 마른 동아줄인지 모를 선생님이라는 분을 찾아가야 했다.
선생님은 다양한 경험의 임상경험을 가진 분인 듯했다. 자기는 마음 선생님이라고, 우리는 잘 될 집이라고 이야기하셨지만 진짜? 하는 마음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상담에 대해서 거부감 없이 시작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2호도 별로 거부감 없이 같이 따라나섰다.
우리 집 문제는 1호와 2호 모두 문제였다. 아빠 엄마도 문제였고. 태도의 문제는 서로 상관관계가 있다. 우리 집 1호는 우직한 성격의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다. 친구는 잘 사귀지만 자기가 맘에 안 드는 친구는 단칼에 안 보고 만다. 근데 또 어떤 점에서는 유순하 기도 한 친구다. 유순한 거 같은데 단호하다. 착한 거 같은데 밉다.
2호는 1호와는 완벽히 다른 인간. 자기애가 강한 이 친구는 정확한 이과 인간이고, 신속, 암기력이 뛰어나고 말도 잘하지만 자기가 싫은 건 죽어도 안 하는 보편적 남자아이다. 남성적이고 편파적인 생각들이 아직 정립되지 않는 초등학생에게 사춘기 누나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고, 경쟁자이고, 미러링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2호는 벌써 1호의 행동을 보고는 학습했고, 1호의 막무가내 전법이 꽤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이 점이 내가 화가 나는 지점의 하나기도 했다. 결국 이 모든 점이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 더욱더 1호가 미덥지 않고 미워 보이게 만들었다.
미운 행동의 문제 원인이 1호인 이상 1호를 해결하지 않고는 탈출구가 없다는 게 결론이었다.
이미 이 싸움에 승자는 1호였다.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속의 1호에게 전보다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근데 인정이 쉽지 않다.
내가 느꼈던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채 산처럼 남아 있는데 그걸 계속 등에 봇짐처럼 계속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것. 그 감정의 소멸은 큰 강을 만나 소금 보짐을 녹여내야 가능한 것이리라. 가도 가도 끝없는 초원에 서서 나는 방향 감각을 잃고 어떤 갈림길에서 잘못 왔는지 복기하고 후회만 가득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1호가 너무 미웠다.
말없이 이렇게 시간이 지나온 그녀가 더 미웠다.
지나쳤을 엄마의 행동에 그걸 묵묵히 견딘 1호는 나에겐 이미 원망의 대상이 되어있었다. 그때는 지나치다 싶은 말들이나 행동이 얼마나 힘들었을지에 대한 공감능력이 무뎌질 대로 무뎌져 있었다.
그렇다. 사람들은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본다.
아이가 그렇게 견딘 건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1호가 견딘 시간이 맨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고, 나 스스로가 힘든 상황만 생각되었다. 내가 견디고 보냈던 시간들이 그렇게 아까울 수 없었다. 원래부터 너무 묵묵한 저 성격으로 얼마나 고단 한 시간을 내가 보냈는지 누가 아는가.
말은 안 해도 누군가 나를 비난하는 거 같은 생각이 들어 더 괴로웠다. 모든 책임이 다 나에게 있는 거 같았다. 아이는 둘이 낳지만 연대 책임보다는 엄마 책임이 되기가 쉽다.
이미 지고 말아야 끝나는 싸움 속에 난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리가 아닌 마음이 움직여야 하는데 내 마음은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이 상태를 그냥 유지하는 정도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대신 아빠가 중간에서 아이와 의사소통을 하고 나는 그냥 최대한의 접촉을 피하는 상태로 가기로 했다. 이건 상담 선생님이 아닌 내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