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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미숙 Sep 04. 2021

슬픔

타고난 팔자려니 인정하면 쉽다.

슬프다.

1. 원통한 일을 겪거나 불쌍한 일을 보고 마음이 아프고 괴롭다.


내가 태어난 날은 엄마가 이불 빨래를 한 날인데

엄마는 추위가 여적 남았는데도 겨우내 쓴 이불을

큰 통에 넣고 발로 밟으며 빨래를 했다.


임신 9개월 산모가 이불빨래를 하고 있으니

버틸 수 있었을까? 당연히 양수는 터져버렸고

엄마는 이른 출산을 위해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엄마를 병원 침대에 눕히자마자 간호사가 소리쳤다.

"머리가 나와요!!!!!"


나는 그렇게 열 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태어났다.

열 달 다 채우지 못한 게 뭐 대수일까.

하지만 내가 태어났을 즈음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 갑자기 알 수 없는 고열로 한 살 터울의 오빠가 죽었고 아빠는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병원에 의식 없이 누워있었다.  지독한 가난이 집을 흔들고 있었고 희망도 없었다. 슬픔 중에 태어난 아이. 그게 바로 나다.


지금까지도 엄마는 내가 태어난 날에 대해

'기뻤다. 너무 좋았다'라고 하지 않는다.

그냥 그때 진짜 힘든 상황이었다고만 말한다.

그래도 내가 태어난 시간을 정확히 기억해주는 엄마가 얼마나 고마운 지...


어쨌든 나는 엄마의 슬픔을 탯줄로 이어받다가

"에이 그냥 나가서 울고 맙시다"라고 생각하고 

'차라리' 그냥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기 복은 가지고 태어난 다는 데

나는 굳이 복이라고 치고 따진다면

슬픔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보면 될 듯하다.


타고난 복 차 버릴 수 있으랴.

인생사 슬픈 게 당연했을 터.

열 살이 지나고 스무 살이 지나고 서른이 지나도록

슬픔은 늘 같은 횟수로 비슷한 강도를 가하며

변함없이 나를 다듬이질했다.

아프다고 그만하라며 연약한 척 고꾸라져도 잔인하게 두들겨 댔다. 쳇.


원망해도 소용없다.

태어나기 전부터 슬픔을 알았구만

타고났다면 어찌하랴.

이제는 탓할 것도 없받아들이자 생각했다.


슬플 땐 슬퍼하자.


그러면 내 인생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 목표가 되겠지.

사람은 지금 없는 것을 얻기 위한 목표를 갖지 않은가.

많이 슬퍼하면 웃는 것에 감사하고 기쁨을 위한 일들을 하겠지. 맞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마음껏 슬퍼하려고 한다.


엉엉.



2. 타고난 팔자려니 인정하면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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