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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TCH Oct 04. 2019

화장을 잘 못하지만 화장이 좋아


전 남자 친구와 사귈 때의 일이다. 하루는 내게 "너에게 사주고 싶은 책이 있어."라며 서점으로 데리고 가더니 미리 봐 두기라도 한 듯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척척 가서 책 한 권을 집어 내게 건네주었다. "???"가 가득하던 내 머릿속은 "!!!"로 바뀌었고 웃음이 터졌다. 지금이야 유튜버지만 당시에는 블로거였는데, 뷰티 블로거계의 최고던 한 뷰티 블로거의 화장 초보를 위한 화장법 책이었다. DVD까지 동봉이었다. 


화장에 관심도 없었고, 화장품도 잘 몰랐고 따라서 화장도 할 줄 모르던 내가 백화점 화장품 매장에서 풀메이크업을 받고 신세계에 눈을 뜨게 됐었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까 전 남자 친구가 책을 사준 것이었다. 화장이 너무 잘 어울렸기 때문에 내심 본인도 내가 화장하길 원했던 것도 있었고 말이다. 어쨌든 그 책은 나의 바이블이 되었고 열심히 공부했다. 화장을 책과 DVD로 배웠는데 요즘 유튜브로 배우는 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그림이지 싶다.


그렇게 화장을 공부하다 갑자기 귀찮아졌다. 이 게으름. 화장을 하는 건 재미있지만 클렌징을 하는 건 귀찮았다. 요리하는 건 재밌지만 설거지가 귀찮은 것처럼. 그러다 보니 안 하게 되었다. 그러자 어느 날 불쑥 전 남자 친구가 물었다.


"요즘은 왜 공부 안 해?"


....


그렇게 수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화장을 거의 안 하는 편이다. 입술에 꽂히는 때에는 입술만 바르고 눈에 꽂힐 때는 마스카라만 바르거나 아이라인만 그린다. 그래서 화장대라고 해도 기초 화장품 정도만 조금 있는 편. 색조 화장품은 친구들이 선물해주는 화장품이 전부다. 허여멀건한 입술 때문인지 친구들은 그렇게도 입술색을 찾아 주려고 한다.


지금 애인은 내 화장에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나보다는 화장품을 더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피부에 관심이 많기도 했고 현재 코스메틱 회사를 다니기도 한다) 내가 관심을 갖는 화장품이 있으면 연습용으로 가성비 좋은 것을 사다 준다. 그래서 내가 잘 쓸 것 같은 것은 보다 좋은 것으로 찾아서 사다 준다. 내 니즈와 내 게으름을 동시에 알고 있는 좋은 남자 같으니.


...


내 화장의 8할은 이렇게 애인과 친구들에 의해 완성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전히 화장품도 잘 모르고 알 생각도 없고 화장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잘할 생각도 없지만 그냥 입술만 발라도 밝아지는 얼굴이 좋고 아이라인만 그려도 달라지는 얼굴이 좋다. 내 얼굴 보는 재미에 화장을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아니 내 얼굴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다. 그냥 그림 그리는 것처럼 색칠 공부하는 것처럼 하지만, 귀찮으니까 간단하게 쓱싹 하고도 만족하는 웃음을 배시시 흘린다.


"화장에 재능이 없나 봐. 화장 잘하는 사람들 정말 대단해."라는 나의 우문에 애인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다니고 정말 화장을 해야 하거나 화장으로 예쁘고 싶어 질 땐 전문가한테 맡기면 돼."라고 자본주의식 현답을 내놓더라. 맞는 말이었다. 화장을 잘하든 못하든은 상관없고 그냥 내 마음 편한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하고, 안 하면 안 하고 그러면 되는 거지. 화장을 잘 못하지만 화장은 좋아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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