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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TCH Aug 31. 2021

유기견이든 아니든


유기견이든, 유기묘든, 그렇지 않든. 대부분 말이 나오는 문제들을 보면 그 기준이 자신(인간)에게 있는 경우가 많다. 내게, 내 환경에, 내 주변에, 내 신경에, 내 상황에 등등. 모든 사랑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 맞춰주는 거라는 건 인간끼리의 한정은 아닐 테다. 상처 받았던 아이들이 어렵지 않을까요?-라고도 하는데, 상처를 받았던 아이들이니까 그 아이들이 고파하는 것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관찰. 또 관찰. 나한테 맞춰주기만을 바라지 말고, 그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뭔지 불편한 게 뭔지 말 못 하고 표현법이 다른 아이들을 보며 관찰하고 생각하고 기다리는 노력을 내가 먼저 해야 한다.


나는 유기견, 유기묘 경험이 다 있는데 그중 두 친구 얘기를 해보자면, 유기견이었던 후루야는 당시 제법 귀한 품종견이었음에도 전주인에게 학대를 받다 버려졌다. 그 트라우마는 후루야가 강아지별로 가는 그때까지도 이어졌지만 이미 나와 두 번째 만남에서 후루야는 내 껌딱지가 됐고, 나는 후루야와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반년쯤 뒤에는 동네 스타가 되어 연예인병에 걸렸고, "자, 나를 만져." 하며 얼굴을 내미는 행동까지도 했다. 


유기묘였던 수지는 데려온 병원에서조차 말을 해주지 않아 범백 후유증으로 뒷다리가 안 좋은지 데려오고 나서야 알았다. 밤마다 아파서 울었고, 계속 마사지를 해줘야 그나마 괜찮았다. 수지가 엥~하는 소리가 나면 자다가도 일어나 눌린 듯 퍼져 있는 엉덩이와 뒷다리를 마사지해줬다. 이건 내 첫 개 초롱이가 중풍에 걸렸을 때 했던 습관이 이어진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해서 수지가 조금이라도 안정을 찾으면 그저 다행이라 생각했다. 수지는 병원 외에는 사람이 거둔 적도 없는 어린 고양이였는데, 사람에게 곁을 안 주고 항상 등을 졌고 구석에 혼자 있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자기가 아픈 걸 봐주고 자기가 외면해도 기다려주고, 만져주고 보듬어 주고 말을 걸어주니까 오래가지 않아 껌딱지가 됐다. 


그런 거다. 유기견이든, 유기묘든, 그렇지 않든, 어딘가에서 받아왔든 사 왔든, 모든 만남과 엮임에 그런 과정은 있을 수밖에 없다. 하물며 인간끼리도 만나서 엮이는 과정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텐데 말이다.


그냥 나와 함께 하기로 한 작은 생명을 지켜봐 주고 기다려줘 보자. 내가 키워주는데 감히-따위 버리고 나를 대하는 어제와 미묘하게 다른 오늘을 즐겨보자. 물론 예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외의 경우 때문에 가능한 경우가 곡해되지 않기를 바라고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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