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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TCH Dec 25. 2022

가가린 (Gagarine, 2020)


다큐멘터리를 찍으려다가 단편 영화가 됐고, 그 단편이 장편이 된 <가가린>. 이 영화의 주인공은 '유리'라는 소년입니다. "가가린"은 '유리'가 살고 있는 공동 주택 단지고요. 그곳은 낡고 낙후된 곳이었지만, 그곳에서 태어나 자란 '유리'에게 그곳은 자기 자신 그 자체였습니다. 내 평생의 모든 것이 흔적으로 있고, 어디를 가도 언제나 결국 돌아오는 곳이 그곳이었기 때문에 '유리'에게 있어서 "가가린"은 자기 자신이자 고향이자 홈이자 가족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가가린"이 철거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말아요. '유리'는 "가가린"을 지키기 위해 푼돈을 모아 여기저기 보수를 하며 아직 이곳이 살만한 곳임을 어필하려 하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곧 철거되는 건물을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나죠. 하지만 '유리'만큼은 떠나지 않고 버팁니다. 아예 건물 안에 숨어 버려요. 


폐허가 되어 버린 건물에 홀로 남은 소년 '유리'는 우주를 좋아합니다. "가가린" 옥상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우주에 대한 동경을 키웠던 '유리'였어요. '유리'만 남고 아무도 없는 "가가린"은 '유리'에게 있어 거대한 우주선이 됩니다. 텅 빈 우주에 거대한 우주선, 그 안을 홀로 외로이 유영하는 우주인이 된 거죠. 최초의 우주인인 '유리 가가린'에서 빗대어진 이름들이라고 생각하면 참으로 어울리는 설정입니다.


'유리'는 우주 정거장도 만들어요. 우주 정거장인지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남루하지만, 우주를 향한 '유리'의 동경과 선망을 판타지처럼 보여주기엔 충분했습니다.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판타지겠죠. 철거를 앞둔 이 형편없는 곳도 누군가에겐 꿈으로 가득 채워진 우주선이고 우주이고 집이다-라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전달합니다.


저는 오랜 세월을 단독주택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공동주택에서의 경험은 없지만, 어렸을 적 동네에는 "가가린"과 유사한 아파트가 있었습니다. 제 또래의 친구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그 아파트에서 놀았어요. 어찌나 낙후되었던지 아파트 곳곳에 무너짐을 방지하는 설치도 되어 있곤 했죠. 하지만 정말 즐거웠습니다. 그런 게 상관있을 나이가 아니었으니까요. 오히려 떠난 사람들이 많아 얼마나 극악스럽게 놀든 혼내는 사람 없이 신나게 놀 수 있어 더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그 아파트에도 결국은 단 한 명의 주거민도 존재하지 않게 됐고, 철거도 되지 않고 그대로 방치되어 귀신 아파트로 유명해졌습니다. 각종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곳을 배경으로 촬영하기도 했죠. 


제가 어른이 될 때까지도 남아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 그 아파트가 철거됐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드디어 사라졌다며 좋아했지만, 그 일을 계기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끼리는 조금은, 어쩌면 많이 섭섭해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사람들은 귀신 아파트라고 놀렸지만, 우리에게는 그곳은 매일매일 새로운 곳이 되어 우리와 함께했으니까요. 철거될 때까지 그 오랜 세월 동안 아파트를 떠돌았을 그 옛 기억들이 <가가린>을 보자 또 한 번 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마지막 "가가린" 철거 장면에서는 실제 "가가린"에 거주했던 사람들도 등장합니다. 그들은 그 장면을 보며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요. 이제야 비로소, 마침내, "헤어질 결심"을 할 수 있진 않았을까요? 저와 제 친구들이 모여 그 아파트에서 놀던 이야기들을 하며, 마치 한 명의 사람 친구와의 추억 팔이를 하듯 떠들며 아파트를 떠나보냈던 것처럼 말입니다.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했다가 극영화가 됐기 때문에 영화 곳곳에 실제 인물이나 실제 장소들이 등장합니다. 실제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고도 하고요. 참 보기 드문 형태의 영화죠. 덕분에 이 영화 자체가 정말 "가가린"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그것이 영화라는 것이 존재하고 미디어라는 것이 발전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존재할 것 같은 삶뿐만 아니라 존재했던, 존재하고 있는 삶도 담아내며 추억하고 응원하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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