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노인 사이, 약간의 애매함
영화 <사람과 고기>는 처음엔 "노인들의 이야기"로 보인다. 그런데 다 보고 나면 이 작품은 단순히 노년의 고단함이나 사회적 사각지대를 말하는 영화라기보다, 노년을 하나의 청춘으로 치환해 보려는 시도에 더 가까워 보인다. 다만 그 시도가 끝까지 설득력 있게 이어지지 못하고, 후반부로 갈수록 캐릭터를 소비하는 방식으로 무너진다.
이 영화의 중심 사건은 무전취식이다. 노인 셋이 고깃집을 전전하며 먹고 튄다. 이 무전취식을 생존의 범죄로 보진 않는다. 그들이 길거리에서 야채를 팔고 폐지를 줍는 노인들의 삶이 녹록지 않다는 현실을 바탕으로 깔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삶이 고기를 무전 취식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동기는 되지 않기 때문이다. 빈곤이라는 현실을 곧바로 범죄의 이유로 연결하는 것이라면 캐릭터는 인간이 아니라 사회문제의 표본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의 범죄는 인생의 마지막 자락에서 과감하게 한 번 질러보는 청춘의 일탈로 보는 편이 더 맞다고 느꼈다. 청춘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영화들이 술 마시고, 범죄를 저지르고, 상소리를 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면서도 "성장"이라는 말로 포장해왔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노인들이 벌이는 이 무전취식도 그들과 다르지 않은, 노년만의 청춘일 수 있다. 인생의 끝에 다다른 청춘. 비록 마지막 순간이지만 여전히 삶의 충동이 남아 있는 상태. 이 영화는 그 감각을 꽤 흥미롭게 잡아낸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다. 영화가 반복을 통해 점점 캐릭터의 결을 단단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무전취식을 계속 과장하고 밀어붙이며 "노인이라서 가능한 진상" 쪽으로 꺾어버리고 만다. 갈수록 이들의 행동은 더 안하무인 해지고, 당당해지고, 일말의 죄책감도 사라진다. 청춘의 일탈이라면 그 안에는 최소한의 망설임이나 균열, 혹은 자기 합리화라도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영화는 그 균열을 충분히 쌓지 않고, 노인이라는 표면적인 설정만 강조한다. 그 순간부터 이들의 행동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영화가 필요한 사건을 만들어내기 위한 장치처럼 느껴진다.
특히 '장용' 배우가 연기한 '우식' 캐릭터는 가장 거슬리는 지점이었다. 캐릭터가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소비된다. 후반부에 그가 시인이었다는 설정이 드러나는데, 그에 걸맞은 밑 작업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굳이 시인이었던 이유는 세계를 관찰하고 언어를 다루고 감정을 다듬어온 인간의 흔적을 담아내는 것에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영화 속 '우식'은 그런 흔적을 거의 보여주지 못한 채 "나는 곧 죽으니 내 맘대로 하겠다"라는 식의 폭주만 남는다. 차라리 시인이라는 설정 없이 끝까지 그런 캐릭터로 밀어붙였다면 오히려 더 솔직했을 것 같은데. 시인이라는 설정이 얹히면서 오히려 캐릭터는 더 설득력을 잃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가진 장점은 분명하다. 노년을 불쌍한 존재로만 만들지 않고, 여전히 욕망하고 관계를 만들고 일탈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인간"으로 보여주려는 시도는 의미가 있다. 이들이 서로에게 대체 가족이 되어주고, 삶의 활력이 되어주는 순간들은 충분히 이해되고 납득된다. 영화가 말하고 싶은 바 역시 명확하다. 노인들의 삶도 아직 인간의 삶이라는 것.
결국 <사람과 고기>는 의도는 좋지만 설계가 끝까지 따라가지 못한 영화다. 노년을 청춘으로 치환하려는 시도는 흥미롭고, 초반의 방향성도 꽤 설득력 있다. 그러나 반복되는 사건과 과장된 캐릭터 소비가 쌓이면서 후반부는 점점 힘을 잃는다. 그럼에도 한 번쯤 볼만한 영화다. 적어도 이 영화는 "노년"이라는 단어를 단순한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한 시기로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