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구산 참(站)

by 심준일

구산 참은 강릉 도호부에서 십오리(6km), 아낙네의 걸음으로도 한 시진(時辰, 2시간)이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바다를 향한 강릉 뿐 아니라 대관령과 닭목령, 삽당령, 대굴령만 넘으면 내륙 어디든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인근 강릉 도호부와 횡계 대관령 부근에 규모가 큰 역참이 있었기에, 구산 참은 그 사이를 잇는 작은 규모로 운영되었다. 그래도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안채와 여러 손님들이 머무를 수 있는 넓은 사랑방이 있었고, 부엌과 창고도 마련되어 있었다.


비록 일종의 관아이기는 하지만 시골집의 모습도 갖추고 있었다. 뒷마당에는 조약돌이 깔린 장독대에 석류꽃이 어우러지고 백일홍, 채송화, 백합, 봉숭아가 심어져 있었다. 그러나 마구간, 외양간은 없는 듯 기르는 짐승이란 마당에 풀어놓은 닭 몇 마리가 다였고 흔한 농기구도 보이지 않았다.


형주를 데리고 구산 참에 도착한 얼음지기가 나지막한 토담 너머로 발을 들였다. 입구에는 구멍에 빗물이 누렇게 고인 문지도리 돌만 놓여있고 널판문이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발졸 영감님 계십니까? 얼음지기입니다.”


큰 소리가 울리자 안채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얼음지기를 알아본 그는 대청으로 급히 뛰어 내려왔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네 그려.”
형주가 보기에 발졸 영감은 영감이라 불리기에는 그리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았다.

“영감님,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아직도 혼자 일하고 계십니까?”
“그놈이 과부랑 눈이 맞아 도망간 지 두어 달 지나도록 혼자 일하고 있네. 일할 사람이 없어”


“정신이 오락가락 해 갈 곳을 잃은 청년을 데리고 왔습니다. 며칠만 이곳에 머물게 해 주십시오.”
발졸 영감은 형주의 아래위를 물끄러미 훑었다.
“여긴 그런데가 아닌데… 자네, 호패는 있는가? 도망친 노비 놈은 아니겠지?”

형주는 제게 그런 것이 있을까 생각했지만, 문득 허리춤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있었다. 꺼내어 보니 나무패였다. 발졸 영감은 패에 새겨진 글과 화인(火印)까지 확인하였다.
“호패 맞군. 죄인은 아니네.”
차림세를 보아도 죄를 짓고 쫓기는 행색도 아니었다.

“내일 자네 신분도 확인할 겸 호패를 갖고 관아로 가세. 혹여나 호패를 위조하였으면 사형인 것 알겠지?”

“사형요?”

“아니다 싶으면 오늘 밤 도망가게. 눈 감아 줄 테니.”

형주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본 적도 없는 이 호패가 자신의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신기하게도 호패에 적인 그의 한자 이름은 정확했다. 다른 한자는 해독하기가 어려웠다.


“아이고 호패 위조를 아무나 합니까. 그나저나 이 친구 상당히 잘 걷던데, 한번 데리고 일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허허, 사람 구하는 건 내가 아니라 관아에서 할 일이니….”
그러면서 발졸 영감은 형주의 장딴지를 슬쩍 건드려 보았다. 굵은 장딴지에 영감은 다소 놀랐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얼음지기를 돌아보았다.
“아니 그보다 자네가 나랑 일해보는 건 어떤가? 천하의 얼음 지게꾼인데.”

그 말을 들은 얼음지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마당으로 들어서던 여자아이가 말을 받았다.

“얼음지기 오라버니는 지극한 효자라서 안 되네요.”

여자아이는 햇볕에 그을려 시커멓게 탄 피부였으나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다. 생선이 담긴 나무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들나물이 담긴 망태기를 오른쪽 어깨에 메고 있었다. 짧은 저고리를 가리고자 치마를 한껏 올려 속바지가 드러난 차림새가 경쾌하기도 하고 철없어 보이기도 하였다.

여자아이와 형주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여자아이가 당돌하게도 눈을 피하지 않아 형주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이 애는 누구요?”
형주는 좀 황당했다. 보기에는 그보다도 어려 보였는데…. 형주는 자기가 대답해야 하는 상황임을 알았다.
“나는 트레일 대회에... 어유, 산에서 뛰다가 길을 잃었는데, 그러다가 당집이 있어서... 거기서 차를 마셨는데... 갑자기 눈 뜨니 여기야. 난 여기 사람이 아니야.”
“생긴 건 곱상한데 좀 실성했네요.”
“…”

얼음지기가 나섰다.
“지인이 삼척 바닷가에서 발견했는데, 바다에서 무슨 변고가 있었나 보지.”
발졸 영감이 얼음지기의 말을 끊었다.
“그보다도 자네, 우리 딸아이가 한 말이 무슨 뜻인가? 효자라서 같이 일 못하다니?”


얼음지기 역시 구산 참에서 일을 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예쁜 산이와 같이 있고 싶은 것이 늦깎이 총각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울진에 계신 노부모가 문제였다. 강릉 구산으로 일을 옮기면 울진으로 틈틈이 달려가 살피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거리보다 큰 문제는 시간이었다. 얼음 떠내는 겨울, 얼음 나르는 여름에만 바쁜 얼음지기는 농번기에 부모님 농사일을 돌봐드릴 수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단 하루도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발졸 영감은 설명을 듣고 이해하였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속상하듯 바라보는 이는 산이였다. 산이는 얼음지기가 사람됨이 좋고 믿음직하다 여겼지만, 여자보다 부모를 앞에 두어야 하는 그에게서 마음을 거두기로 했던 것이다.

화, 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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