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발졸의 연분

by 심준일

다음날 발졸 영감은 형주를 데리고 강릉 도호부로 향했다. 발졸 영감은 이방을 찾아가 형주의 호패를 보여주며 신분확인을 요청하였다. 도호부에는 여러 지방에서 수배 요청을 하는 관첩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를 모두 확인한 결과 이상이 없었다. 이어 호패에 기록된 소재지인 부산 동래부에 공문을 보내 진위를 문의했고, 며칠 뒤 그 내용에 거짓이 없다는 회신을 받았다.

형주로서는 다행한 일이긴 한데, 또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자신의 신원이 확인된 자체가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내가 부산에 살았다고? 기껏 부산 산골짜기를 뛰다가 여기 떨어진 건데? 내가 정말 이 시대에 실존하는 인간이란 거야?’

신분도 확인되고 나서 며칠 후에 발졸 영감이 넌지시 형주에게 물어보았다.
“얼음지기가 자네를 추천한 거 생각나지? 자네가 꽤 잘 달릴 것처럼 보였나?”
형주는 자신이 마라톤 선수라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많이 뛰어다녀 그렇습니다. 그런데 뭘 추천했다는 겁니까?”
“뭐겠나? 여기서 하는 일이 보발일인데. 자네도 알다시피 이 참에 세명은 있어야 하는데 나 혼자 있으니 ….”
“보발이라뇨?”
“아 모르는구먼. 별거 아니네. 공문서를 전달하는 일이지. 전국 곳곳에 연결된 역참에…. 주로 한양으로 보내는 거지만.”
“그거 말 타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전 말 못 타는데요.”
“허 참, 말 타는 것은 기발이고… 기발은 황해 쪽 연결하는 길에서나 보지, 산세 험한 조선 대부분 길은 우리 발졸이 뛰어야 하네.”

발졸 영감은 형주가 보발 시주(試走)를 보고 합격하게 되면 전답이 지급될 것이고 부역도 면제됨을 알려 주었다.
“거기다 참에서 밥도 주고, 입을 것도 주고, 잠 잘 데도 제공해 주고, 뛰니 건강에도 좋고… 이런 팔자 좋은 데가 조선 팔도 어디에 있나? 다들 하고 싶어 난리지만 다리가 건실해야 해서…”


형주는 발졸 영감의 말이 그리 믿음이 안 갔지만 선택의 여지도 없는 듯했다. 이 영감은 형주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잘 데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영감이 알랑거리는 긴 말을 요약하면 ‘너 여기서 나갈래 말래’ 였던 것이었다.


본래 작은 역참이라도 발장(撥長) 하나, 그 밑에 발졸이 둘이 있는데 이곳 구산 참은 발졸 영감뿐이었다.

두 명이 비게 된 건 순전히 철없는 후배 발졸 때문이었다. 동네 향리 이방의 집에 과부 며느리가 살고 있었는데 발졸을 불러 친정으로 가는 서신을 부탁하였다. 사적인 심부름인지라 거절하려 했으나, 서신 한 장 마음대로 보내지 못하는 출가외인의 처지가 딱하기도 했고 향리의 며느리이니 뒤탈도 없으리라 여겨 청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서신의 횟수가 거듭되면서 두 사람 사이에 연분마저 쌓였고, 결국 이 사실이 시댁에 발각되었다. 두려움을 느낀 여자는 한밤 중에 발졸을 불러 멀리 도망가 버렸다. 향리는 사람을 시켜 둘을 잡아 오려하다가, 집안 망신이 될 것도 같고 친정아버지의 설득도 있어 조용히 덮어 두기로 하였다. 대신 감독 책임을 물어 발장을 물러나게 한 것이다.

역참에 발졸 영감 혼자 남다 보니 교대 근무를 할 수 없어 형주에게 말한 데로 참에서 먹고, 자고 해야만 했다. 그나마 딸이 있어 하루 두 번 참에 와서 영감의 식사를 챙겨주고는 했다.

형주는 결국 보발 시주를 받기로 했다. 날이 잡혀 도호부에 가는 날, 형주가 일어나자마자 영감 딸이 벌써 아침을 해왔다. 쌀밥, 그리고 막장에 나물을 넣고 끓인 찌개였다. 왠지 신이 나는 표정이었다.
“너 밥 먹어라. 오늘 보발 시주가 있다 해서 일찍 차려 온 거야.”

어려 보이는 것이 또 말을 놓았다.

“너 왜 자꾸 나를 ‘너’라고 하니?”

“응? 너 이름 뭔데”

“형주”

“그래, 형주야 밥 먹어라”

“…”

“형주야 그런데 넌 내 이름 아니?”

“아니”

“’아니’는 아니고”

“…”

“모르지?”

“응”

“'산이’야. 앞으로 그렇게 불러.”

뒷마당 굴참나무 위에서 곤줄박이 새가 ‘삐이 삐’ 울었다. 산이가 곤줄박이 같다고 생각했다.


“쌀밥 맛있지? 진사댁 아기씨한테 졸라서 한 줌 얻어온 거야.”
영감 딸은 이번에 사발에 누런 물을 내왔다. 마셔보니 생강에 석청을 넣어 끓인 물이었다.
“달음질할 때는 생강 끓인 물이 아주 좋아..”
“너는 내가 발졸이 되기를 바라는구나.”
“지금 아버지 혼자서 고생하시는 게 안타까워서 그렇지 뭐.”

형주에게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은 산이였다. 그러나 관심의 표현이 특이했다. 심심하면 형주의 옆구리나 등을 찔러댔다. 놀리는 것에도 재미를 붙였다.
“사내가 삐쩍 말라 힘도 못쓰겠구먼요”
“신경 쓰지 마. 근육은 많아.”
“근데 너 말이야 양반집 도련님도 아니면서 얼굴이 예쁘게 생겼니?”
“…”

발졸 영감이 형주에게 대신 변명을 했다.
“오년 전 죽은 엄마가 이 애를 그렇게 귀여워했네. 불쌍해서 응석을 받아 주었더니 철이 좀 없어.”

얼마 전 또 형주에게 옆구리를 찌르며 말을 걸었었다.
“너 보발을 하고 싶다면서? 그럼 빨리 뛰겠네”
“당연하지”
“그럼 여기서 저기까지 한번 뛰어봐”
또 얘가 심심하구나 생각하고, 형주는 몇 걸음 뛰는 시늉을 하였다.

그 모습을 보더니 산이는 툇마루에서 일어났다. 안마당으로 몇 발자국을 뛰었다. 살살 뛰는 척하였는데도 몸이 흔들거리며 넘어졌다. 치마가 올라가면서 드러난 산이의 다리… 오른쪽 발목이 굽어져 있었다.
“나는 다리가 이 모양이라 뛰지를 못해.”
산이는 자신이 그렇게 말해 놓고는 마치 형주한테 놀림받은 것인 양 ‘흥’ 하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산이는 늘 걷는 모습이 부자연스러웠다.

형주는 아침을 먹고 발졸 영감과 함께 도호부에 갔다. 달리기 시험은 간단하였다. 도호부에서 십 리 정도 떨어진 당간지주(幢竿支柱)까지 달렸다 돌아오는 거였다. 발졸 영감은 형주에게 짚신보다 발이 편한 미투리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도착할 때까지 내내 옆에서 형주의 옆에서 뛰어 주었다.


부사와 담당 이방이 참관을 하였는데 형주의 속도에 만족을 하고는 합격을 통보하였다. 발졸 영감은 기분이 좋았는지, 구산 참으로 돌아와서는 창고에서 오지항아리 한통을 들고 나왔다. 소쿠리 안에서 햇빛에 말린 열기 몇 마리를 꺼내어 왔다.
“이거 백주인데, 홍천에서 출장 온 하급관리가 우리 참에서 묵었을 때 고맙다고 주고 간 거야. 역참에서 술 마시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니까 몰래 한 잔씩만 마시지.”

두 사람은 투명한 백주를 찔금 찔금 나누어 마셨다. 형주는 발졸 영감이 어떻게 보발일을 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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