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댁에는 살림도 돌보고 부인의 시중을 드는 여종이 있었다. 행실도 바르고 일도 열심히 해서 부인이 아끼는 종 이었다. 혼기가 되자 진사 부인이 그녀를 불렀다.
“얘야 너는 누구에게 시집가고 싶느냐?”
진사댁은 강릉에서 손꼽히는 부자로 총각 노비만 하여도 족히 열명은 되었다. 대부분 외거노비였기 때문에 시집을 가면 진사댁 밖에서 살림을 꾸릴 수 있었다. 여종은 머뭇거리다가 답하였다.
“마님, 달음질 잘하는 사내로 중신해 주세요.”
“달음질 잘하는 사내? 왜 그러니?”
“소인의 외증조 할미는 조선 생기기 전에 양인이셨다 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려말에 북쪽 오랑캐가 고을에 침입할 때 외증조 할아비는 도망가다 잡혀 포로가 되었습니다. 할미는 자식들을 굶어 죽일 수 없어 권문세족에 스스로 찾아 가 종이 되었고요.”
“그럼 할머니 이후 후대 자식들은 죄다 노비가 되겠구나.”
“그렇습니다. 그때 할아비가 달음질 못한 탓이지요.”
정말 그때 달음질을 잘했더라면 포로가 되지 않고 잘 되었을까마는, 여종은 한이 맺힌 듯 눈물을 연신 닦았다.
무심결에 물어본 것이었는데, 여종의 아픈 마음을 읽은 부인은 집안 노비 중에서 달음질 잘하는 사내를 찾고자 했다. 그때 눈에 띈 것이 진사의 농지 수마지기를 경작하던 외거노비 만수였다. 달음질도 잘하였지만, 착한 성격도 여종과 잘 맞을 것 같아 두 사람의 중신을 섰다.
만수는 예전부터 마음에 있던 여인인지라 진사에게 정식으로 두 사람의 혼사를 청하기로 결심하고, 여종을 만나 의논하였다.
그런데 여종은 뜻밖의 말을 했다.
”댁이 마음에 없는 건 아녜요. 그렇지만 저 시집 안 갈랍니다.”
”아니, 왜요?”
”제 자식도 억울하게 종으로 사는 꼴은 못 보겠어요.”
"... ”
남자라면 태어날 자식을 노비에서 벗어나게 할 방도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지만 양인 여자와 혼인을 하면 되었다. 그러나 국법상 여자가 낳은 자식은 아비의 신분과 상관없이 노비가 되어야 했다. 그러니 여종은 제 몸이 자식에게 내리는 천벌이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만수는 김매기를 하다가도 호미를 내 던지고 논두렁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며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는 마음을 굳힌 듯 단독으로 진사를 찾아갔다.
그는 진사에게 모아놓은 곡식과 재물을 드릴 테니 자신과 여자를 면천시켜 달라고 했다. 부지런했던 그는 주인에게 바치고 남은 곡식을 이웃에 이자를 붙여 꾸어 줄 정도가 되었고, 농한기에 부역이 없으면 텃밭도 일구며 조금씩 재산을 불려 왔었다. 그것으로도 면천 속량금을 지급하기에 부족해 주위로부터 높은 이자로 곡식을 빌리기로 했다. 진사는 노비를 잃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으나 그의 부인의 간곡한 설득으로 만수의 청을 들어주었다.
자유와 사랑을 한꺼번에 얻은 만수 부부는 서로를 끔찍이 아꼈다. 예쁜 딸까지 품에 안게 되자, 젊은 시절 천한 신분으로 살아야만 했던 부부는 세상 그 어느 권세가도 부럽지 않게 되었다.
다만 먹여 살릴 입이 늘어났으니 생활이 궁핍해지는 것은 벗어날 수 없었다. 노비시절 경작하던 땅을 소작 붙여 농사를 지었으나, 속량금 마련하느라 빌린 곡식의 이자까지 갚고 나면 추수 후 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
다행히 진사 부인이 이런 사정을 알고 만수의 처를 집으로 불러서 이것저것 일감을 주었다. 부인에게도 만수 딸보다 두어 살 위인 딸이 있어 일손도 요긴하던 차였다. 그 덕에 만수네 가족은 어려운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나, 하늘이 무심했던 것일까. 딸아이가 제법 뛰어다닐 무렵 아내가 갑자기 열이 오르더니 사흘 만에 눈을 감았다. 만수가 누리던 행복한 세상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때는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전히 얼어 있는 땅을 겨우 파서 아내를 묻어주었다.
춘궁기라 곡식이 바닥나고 있었다. 진사 부인이 사람을 시켜 몰래 먹을 것을 보내왔지만, 염치없는 처지에 계속해서 받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이방을 찾아가 환곡을 요청했다.
“지금도 주변에 빌린 곡식이 많다고 들었는데, 환곡마저 타가면 가을에 이자는 어쩌려고?”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잠깐, 자네가 예전 김 진사 댁 노비 중 다리가 가장 빨라 편지 심부를 도맡아 했었겠다. 맞나?”
“그랬었죠”
“잘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