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몸을 흔들었다. ‘아차, 잠이 들었나 보다.’ 당집의 남자가 깨운 것이라 생각하고 형주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코끝을 스치는 것은 형주에게 익숙한 짭짤한 바다 내음이었다. 당집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해변 석회암이 침식되어 만들어진 작은 동굴 입구에 누워있었다. 잠을 깨운 남자는 형주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곧이어 머리를 풀어헤친 남루한 차림의 사내 서너 명이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그중 한 명은 입술에 검붉은 피딱지가 눌어붙어 있었다.
“병졸들이 오고 있다.” 밖에 서 있던 남자가 소리쳤다. 모두 굴 밖으로 뛰쳐나갔다. 형주가 당황하여 머뭇거리자 그를 깨웠던 남자가 “어떻게 할 거야”하며 소리 질렀다. 형주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남자의 뒤를 쫓아 바다로 향했다. 모래사장에서는 발이 푹푹 빠지면서 속도가 나지 않았지만,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바닥에 올라서자 노면은 잘 닦인 포장길처럼 단단하였다. 사내와 형주는 전속력으로 질주하였다.
나머지 일행은 달리기가 시원찮았던지 뒤따르던 군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멀리 달아난 형주 일행을 뒤쫓기에는 역부족이라 판단했는지 더 이상 군졸들의 추격은 없었다. 두 사람은 해안을 에워싼 곰솔 숲으로 몸을 숨겼다. 한참을 더 내달린 끝에 앞서가던 사내가 걸음을 멈추고 형주에게 잠시 쉬어가자고 했다.
“저놈들은 배나 타던 기선군이라 뭍에서 뛰는 꼴은 영 젬병이야. 허나 날이 밝으면 관아에서 포졸들을 풀어 우리 뒤를 샅샅이 뒤질 것이네.”
“그보다도 제가 왜 지금 여기 있는 겁니까?”
“뭔 뚱딴지같은 소린가? 자네가 처음부터 그 굴속에서 숨어 있다가 나를 따라오지 않았나?”
“숨은 게 아니라… 눈을 뜨니 거기였어요. 다들 뛰길래 얼떨결에…”
“자네, 정신이 좀 나갔구먼. 행색을 보니 나처럼 쫓기는 신세도 아닌 것 같은데.”
형주는 자신의 차림을 살폈다. 놀랍게도 하얀 저고리에 통이 넓은 바지 차림이었다. 형주는 꿈을 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사내는 천천히 걷자고 했다. 대보름 달빛에 의지해 길을 찾고 있었다. 곰솔 군락 너머 거무스름한 바다 수평선에는 조업 중인 배들의 희미한 불빛이 한 줄로 서 있었다. 다행히 육지 쪽에 움직이는 불빛은 발견되지 않았다.
걷는 동안 형주는 사내가 도망치는 이유를 들었다.
“군적에 오른 어린 시절부터 배 위에서 노를 잡으며 온갖 고생을 다 했네. 그런데 기껏 하루 영밖에 나갔다고 모가지가 날아가게 되었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더군”
울진에서 군선의 노를 젓는 격군(格軍)이었던 사내는, 솜씨가 좋아 ‘노장군’으로 불리었다. 하루는 노장군이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는데 홀로 계신 어머니의 병세가 심상치 않았다. 군영에 와 있으면서도 여간 마음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마침 훈련 계획도 없던 터라 잠시 집을 살피러 근무지를 떠났다. 그런데 하필 그 무렵 왜구들이 해안에 나타나 어부들을 살해하고 노략질을 하였다.
군영에서 군졸을 보내 왜구를 물리쳤지만 피해가 너무 컸다. 절도사는 전시 중 도망친 수군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색출 명령을 내렸는데, 이중에는 노장군도 포함되었다.
동해의 탈영병들은 삼척포 진영(鎭營)에 압송되어 재판을 받아야 했다.
당시 진영을 지휘하던 첨사는 가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훈련 중 노 젓는 박자를 놓쳐 배가 암초에 걸리거나,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어선을 뒤지다 붙잡힌 격군에게 곤장 백 대를 내리는 일도 있었다. 곤장을 맞은 격군은 피부가 파열되기 일쑤였고, 심하면 장독이 올라 사망하기까지 하였다. 이런 분위기로 보아 탈영병은 정라진 저잣거리에서 효수를 당하고 머리가 거리에 매달릴 것이 확실시되었다.
삼척으로 압송할 때는 병졸들이 탈영병들을 오랏줄로 묶어 해안길로 끌고 갔다. 도중 해신제가 한창인 해신당을 지나게 되었는데, 거기서 병졸들이 술과 음식을 대접받았다. 경계가 느슨한 사이, 죄수들은 칼날보다 더 날카롭게 돌출된 바닷가 석회암에 손을 가져다 결박을 끊어내고, 전력을 다해 북쪽으로 도망쳐 온 것이었다.
“군율을 세운답시고 뻑하면 병사들을 처형하고는, 그들이 원귀가 되어 마을을 해칠까 무당까지 불러대니 이래저래 억울한 일이지”
노장군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형주는 여차하면 목이 잘릴 탈영병과 같이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에 공포가 몰려왔다. 이건 그냥 꿈이 아니라 악몽이었다.
노장군과 함께 해안을 벗어나 산등성이로 올라가자, 달빛 아래 마을의 윤곽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저쪽으로 내려감세”
노장군을 따라가니 달구지 하나가 지나갈 만한 길이 나있었다. 두 사람은 그 길을 따라 냅다 내달렸다. 바다에서는 보이지 않던 거대한 산줄기가 앞을 가로막기 시작했고, 산기슭 아래 소나무를 거칠게 깎아 만든 너와집 한 채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