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의 설명으로는 이 번 대회는 약간 괴팍한 사람들이 모여 달리는 것이니 그냥 즐기면 된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 대회 안내서를 꼼꼼히 보았다. 준비물에 랜턴도 있네. 아, 출발이 저녁 9시니까 랜턴이…. 제한시간은... 16시간? 도대체 얼마나 긴 코스이길래… 60km라고? 게다가 누적상승고도가 4,000m?
조금 뛰어가는 수준이 아니었다. 트레일러닝화를 신고 뛰는 것도 불편했다. 15km마다 체크포인트(Check Point)가 있었지만, 도중에 필요한 물과 음식물을 베스트(Vest) 안에 넣어 가야 하는 것도 번거로웠다.
털보 형에게 속아 이 고생을 하게 된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산에서는 뛰어도 뛰어도 제자리였다. 달리는 형주에게만 시간이 흐를 뿐, 주변에는 시간이 작동되지 않는 것 같았다. 어둠 속 산봉우리의 실루엣은 아무리 달려도 크기가 변하지 않았다.
구름이 초승달을 가리자 별들이 더욱 선명해져 갔다. 나무는 이제 윤곽으로만 볼 수 있었고, 사물의 형체 대신 이상한 짐승소리가 형주의 감각을 채웠다.
혼자서 어둠 속을 헤치고 가자니 점점 두려움이 몰려왔다. 갈림길 앞에 섰다. 어느 쪽일까 망설이는 순간 누군가 나타났다. 그는 길을 꺾어 형주의 앞, 오르막 쪽을 향해 걸었다. 배낭도 없는 일상복 차림으로 보아 등산객은 아니었다. 랜턴빛에 드러난 짧은 머리의 사내는 형주를 보고도 무표정했다. 그가 향하는 길목에 야광리본이 눈에 띄었다. 그와 동행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 뒤를 따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숲길을 돌아 정상에 오르니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올라온 길 맞은편, 잡목과 풀 사이로 길이 가파르게 내려가고 있었다. 땅이 움푹 파이고 돌부리가 곳곳에 솟아 있어 몸의 중심을 놓치고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였다. 산사태로 쏟아진 바위 무더기가 길을 막아서기도 하였고, 땅속에서 새어 나온 물로 길이 질퍽하고 미끄러웠다. 조심스레 발을 내딛으며 무릎으로 몸을 버티었지만 어느새 허벅지에 통증이 생기면서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다.
겨우겨우 내려오다가 평탄한 둘레길을 마주하였다. 그런데 리본이 보이지 않았다. 스마트워치의 GPS로 경로를 확인해 보아도 방향이 애매하였다.
그때, 둘레길 왼편에 누군가의 랜턴 불빛이 번뜩였다. ‘저길이 맞구나’ 형주는 더 지체하지 않고 불빛으로 달려갔다. 상대방도 열심히 달리는지 불빛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다 불빛이 사라졌다. 내리막이나 굽어진 모퉁이가 있으려니 생각하며 10분 남짓을 더 달렸으나, 빛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불안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때였다. 앞에 큼직한 불빛이 나타났다. 빛으로 주변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드러났다.
‘어.. 저건 집이잖아’
가까이 가보니 당집의 형체가 보였다. 진흙과 돌로 거칠게 섞어 올린 민도리집이었다. 지붕은 기와대신 양철이 책을 엎어 놓은 듯 올려져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었는지 붉은색으로 바래 있었다. 창문이 어느 곳에도 없었지만, 엉성한 문틈 사이로 옅은 빛이 새어 나왔다. 깊은 산속 길 끄트머리에 생뚱맞게 자리한 당집 앞에서 형주는 당혹스럽게 서 있었다. 안에서 인기척을 느낀 누군가가 문을 조금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아, 아까 삼거리에서 마주쳤던 그 남자였다.
“누구세요?”
“지금 트레일… 산악 마라톤 대회에 참가 중인데요... 여기 혹시 사람들 지나가지 않았던가요?”
“내도 방금 전 도착했지만 하여튼 사람이 지나갔을 리 없어요. 여기는 지나가는 길이 없어요. 돌아가야 해요.”
“계명봉으로 가야 하는데요.”
“고당봉에서 내려왔으면 둘레길에서 이쪽으로 꺽지 말고 계속 내려갔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길이니까 깜깜한데 고생하지 말고 그냥 마을 쪽으로 쭉 가는 게 좋아요.”
길을 잘 못 든 것이었다. ‘아, 불빛에 속았구나.’ 다시 돌아가려면 20분 이상 달려야 했다.
“저는 마을로 가면 안 되어서요”
“ 아이구 어쩌나. 꽤나 힘들어 보이는데, 일단 들어와서 차나 한잔 마시고 가시던지….”
어차피 늦었으니 좀 쉬었다 가는 편이 낫겠다 싶어 형주는 당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작은 제단 위에는 빈 향로가 놓여있었고, 엉성한 서까래 사이로 붉은 천 조각들이 늘어져 있었다.
벽 한편에 족자가 걸려있었는데, 그림이 좀 특이했다. 산신령의 모습이 아니라 사극에서 보던 군졸 복장의 사내였다. 유독 색채가 눈에 띄었다. 남색 밤비 위에는 붉은 허리띠를 매고 있었고, 벙거지에도 붉은 깃이 꽂혀 있었다. 하지만 형주는 이 그림에 시선을 오래 두지 않았다. 잘못 든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다시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달려야 한다는 막막함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당집 사내가 붉은색 액체가 담긴 병을 가져왔다.
"과일 차예요"
스텐컵에 생수를 붓고, 병에 담긴 과일청을 서너 숟가락 떠서 넣고는 휘저었다. 과일청인데도 꽃 향기가 나는 듯했다.
"물을 끓일 데가 없어 찬물에 탔지만 오히려 향기는 더 좋을 겁니다. 드세요"
사내가 건네주는 차 한잔을 마시니 마음이 편해졌다. 족자의 그림을 보며 사내에게 물어보았다.
"산신령인가요"
"아뇨 그냥 조선시대 사람인데…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달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 알고 있죠.”
"달리는 일이요?"
“예, 발졸이라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아실 겁니다. 일단 차 한잔 하시죠.”
과거에도 달리는 직업이 있었다는 사실에 흥미가 일었다. 형주는 남은 차를 몇 모금 더 들이켰다. 그런데 이상하게 참기 힘든 졸음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