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까지 마라토너였던 자가 홀로 산길을 달릴 때, 무엇이 가장 낯설까?
아스팔트를 밀어내는 쿠션의 반발력 대신 나무뿌리나 돌부리에 박히는 러그의 감각일까?
아니면 응원하는 인파 대신 하늘을 가린 채 흔들리는 나뭇잎, 혹은 직선의 도로 대신 허벅지를 짓누르는 지독한 오르막과 위험스러운 비탈길?
아니었다. 가장 낯선 것은 시간이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하늘이 아직 어둡지 않다는 감각만 있을 뿐, 페이스를 확인하기 위해 들여다보던 스마트워치의 초 단위 시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호흡이 거세질수록 억눌렀던 기억이 역류했다. 도망치기 위해 선택한 부산의 산길은 그리 좋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 듯했다. 오히려 오르막에서의 고통과 기억의 고통의 합쳐져 강도를 더할 뿐이었다.
형주는 머릿속을 맴도는 기억이 며칠 전 일인지, 아니면 한 달 전의 일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먼저 그녀에게 전화가 왔었다. “떠난다고 말해서 미안해. 그런데… 누가 먼저 말하든 떠나는 이유를 만든 건 너란 것을 알아줘.” 전화를 끊는 순간 이것이 끝이 아닐 거란 예감이 들었다. 이튿날 실업 육상팀 관리팀장과의 면담이 이어졌다.
팀장은 형주가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않냐는 투로 말했다.
“감독님이 직접 말씀은 안 하셨어도, 형주 씨 계약 연장이 팀에 부담이라는 건 본인도 알고 있죠? 그렇죠?”
“제게 더 이상의 가능성이 없다고 보는 건가요?”
“형주 씨는 시간이 걸리는 스타일 같아요. 기다려주면 좋겠지만 군대가 있잖아요. 지금 기록으로 상무는 힘들죠? 그렇죠? 일반병으로 가면 선수생활은 끝이잖아요. 우리 입장에서는 새로운 유망주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에요.”
형주는 팀장의 말투가 불쾌했다. 그는 형주가 일말의 미련도 갖지 못하도록 명확하게 이야기하려는 듯 하지만, 자신의 논리에 동의를 강요하는 듯 느껴졌다.
“마라톤에 대한 형주 씨 열정도 신입 때 같지는 않은 것 같고요”
“열정요?”
“예. 열정요. 선수라면 열정 정도가 아니라 적어도 최고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형주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관리팀장이라지만 종일 책상에 앉아 서류나 뒤척이는 그가 그런 단어를 거리낌 없이 입에 올린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형주에게 ‘열망’을 말한 적이 적이 있었지 않던가?
“형주야 넌 내게 사랑을 얻겠다는 진지한 열망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어느 순간 너는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아. 뭔가 허전하더라.”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닥치자 흘러가던 일상의 시간이 멈추는 것 같았다. 마치 스탑워치의 종료 버튼을 누른 것처럼. 뒤로 돌아가 해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시간의 축에서 전개되는 삶이란 늘 비가역적이니까.
형주는 두 가지 사건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두 사건의 뿌리는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이 고통을 한 번만 견디면 모든 게 끝날 터였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열망’이 아니라, 잠시 몸과 마음을 숨길 도피처였다.
팀장과 면담을 마친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형주는 자신이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마라톤이란 게 그래. 늘 속도만을 생각했지, 방향은 고민해 본 적이 없어”
털보 형이 부산에 살고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바닷바람을 쐬는 것도 좋겠다 생각하며 형주는 곧장 역으로 달려가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털보 형은 고등학교 육상부 선배였는데, 자유분방한 성격이 육상과 맞지 않았는지 졸업과 동시에 선수생활을 포기하고 입대를 했었다.
산속은 어둠은 바깥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사방이 능선으로 둘러싸여 도심의 불빛도 차단되었다. 헤드랜턴의 불빛이 약한지 앞길을 뚜렷하게 볼 수가 없었다. 멀리서 불빛을 반사하는 야광리본과 앞선 이들의 랜턴 불빛으로 방향을 겨우 알 수가 있었다. 해가 지기 전까지 같이 달리던 주자들은 형주의 걸음이 처지기 시작하자 어둠 속으로 앞서 사라졌고, 형주는 산속에 혼자 남는 처지가 되었다.
형주는 그저 바닷바람을 쐬려고 부산 털보 형을 찾은 것이었다.
“형, 이젠 나 뭐 할까? 마라톤은 끝이야.”
형주는 술에 취해 얼굴이 상기되었다. 선배는 형주의 술 취한 목소리가 귀엽다는 듯 웃음기를 놓치지 않았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안을 하였다.
“다다음 주 내가 기획하고 있는 러닝 대회가 열리는데. 거기 참가해라. 너 지금 상황에 딱 좋다.”
“무슨 얼어 죽을 러닝 대회?”
“로드러닝은 아니고 ‘트레일러닝 대회'”
트레일러닝. 털보 형이 제대 후 선택한 것은 트레일러닝이었다. 특전사 시절, 그는 소총 한 자루만을 들고 남한산성 중턱을 달리는 산악구보 훈련에 재미를 들였다. 기록이 측정되긴 했지만 트랙처럼 초 단위로 페이스를 맞추지 않아도 좋았다. 심장이 터질 듯한 압박을 견디며 정상에 올라선 뒤, 내리막을 쏜살같이 내달리며 평생 맛보지 못한 강렬한 희열을 맛보았다. 그래서 그가 찾아낸 것이 트레일런이었다.
“트레일런은 크로스컨트리나 컨트리 스키로 체력을 다진 서구애들이 좋아하지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을 걸”
“그야 모르지.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 오히려 마라톤보다 더 맞을 수도 있어. 어쨌든 너 같은 마라톤 엘리트 선수가 참가해 주면 좋겠다.”
“까짓, 등산한다 생각하고 가보지. 몇 킬로 뛰는 건데?”
“나중 알려 줄게. 그냥 부산 백양산에서 장산까지 조금 뛰어가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