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치프레스 좋아하세요?
˝안녕하세요˝
스마트폰에 낯선 전화번호가 뜨면 궁금함, 설렘, 걱정, 이건 뭐지? 하며 잠시 드는 느낌 같은 것들이 있다.
첫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전화를 준 사람의 이미지가 떠오르면서 목소리에 집중한다.
‘여보세요‘ 이 한마디에서 시작한다.
최근 받은 낯선 전화들 중에 기억에 남는 목소리들은
연세가 지긋하고 목소리가 큰 어르신 한 분과 늦둥이 4살 어린이를 둔 엄마, 밝은 목소리로 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신, 내 표현대로라면 50대 후반의 아주머니다.
목소리가 큰 어르신은 지은 지 오래된 집에 살고 있는데 지붕 하고 창을 고치고 싶으시다고, 시간 좀 내어줄 수 있겠냐고 아주 큰 소리로 말씀을 주셨다.
전화기 너머로 미루어 볼 때 연세가 많으셔서 귀가 잘 안 들리는 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나도 큰 소리로 ˝예 선생님 사무실로 와 주시겠어요? 라며 주소는 문자로 보내드리겠다고 했다. 며칠 후에 만난 어르신은 오래된 안경을 쓰시고 말끔하게 정리된 옷차림으로 사무실을 방문해 주셨다.
나이로 치자면 아마도 아들뻘 되는 나를, 짙고 두꺼운 안경 너머로 이야기하듯 ˝선생님 제가 집을 지은 지 오래되었는데 그 집을 좀 고치고 싶어요. 그런데 제가 아는 것이 없어서 도움을 받고 싶은데 도와주시겠어요?˝라는 갖추어진 요청에 ˝네 어르신 자세한 것은 살고 계시는 집을 보아야 알겠지만 제가 거들 수 있는 일은 거들어 드리도록 할게요˝
며칠 후 어르신의 집을 방문했다.
넓은 정원에는 40년이 넘은 커다란 모과나무가 서있고, 반듯하게 정리된 화단, 한쪽에는 푸성귀가 가득한 텃밭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본 어르신의 집이었지만 오래되었다고 해도 정갈하게 관리가 되고 있는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함께 살고 계시던 노부모는 돌아가신 지 몇 년이 되었고, 자식들은 모두 서울에서 살고 있고, 혼자 살기에는 집이 너무 큰데, 고장이 나기 전에 미리 수선을 하고 싶다시며, 집구석 구석을 보여 주셨다
일주일에 한 번 돕는 이 아주머니가 오셔서 집 청소를 하고 가신다고, 어르신은 내가 할 질문을 미리 아신 듯이 먼저 이야기해주셨다.
꽤 오래된 집이 지만 설계도 야무지고 공사도 흠잡을 데 없는 집이었다.
˝어르신 오래되었지만 좋은 건축가들과 집을 지으셨네요˝라는 이야기에 그때는 그런 것을 잘 몰랐는데 살아보니 알겠더라는 말씀을 나누어 주신다.
평범한 집이지만 계단의 손잡이 난간, 문고리, 문의 모양, 창의 위치, 고가구, 주방의 형태, 그 집의 냄새 같은 것을 유심히 눈요기하며, 오래된 집의 정취를 살폈다. ˝그런데 어르신 집이 아직 큰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어디를 손보고 싶으신 거죠?˝라는 질문에 먼저 커피 한잔 하고 이야기 하자며 잠시 기다리라고 하신다.
커피물 끓이는 소리가 들리는 동안 거실 마루 바닥과 유리 탁자 위, 벽에 걸린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였지만 내가 이곳에서 나이 들어 혼자 산다면 어떤 기분이 들지 상상을 해보았다. 소파 위에는 몇 권의 책이 있고, 탁자에는 깔끔하게 비워진 재떨이, 그리고 영양재 몇 통과 약봉지가 놓여있었다.
선생님은 잠시 후 커피잔과 프렌치프레스를 쟁반을 받침으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프렌치프레스를 누르고, 커피를 내리신다.
˝어르신 프렌치프레스가 오래되었네요. 쓰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라는 질문에 "글쎄요 오래돼서 기억은 나지 않는데"라며 프렌치프레스 특유의 원두 맛이 느껴지는 커피를 잔에 가득 담아주셨다.
전화기에서 들었던 ˝여보세요˝같은 맛의 구수한 커피를 맛보면서 원두 맛도 사람을 따라가는 것을 혀와 코에서 생각보다 먼저 알아차린다.
내가 내려주는 원두 맛도 이런 것일까? 내가 쓰는 물건 중에 어르신의 프렌치프레스 같이 오래된 물건은 어떤 것이 있을까 하고 잠시 찾아보았는데 마땅히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어르신 커피맛이 좋아요˝
˝글쎄요 난 그냥 이렇게 마신 지 오래돼서, 사람들은 커피가루가 섞인 건 싫어하기도 하는데 난 이게 편하더라고˝
차를 마시는 잠시 동안 사람이 살아온 시간들을 추적하고 있는 나를 보며 건축가라는 직업은 참 별난 직업이다 싶었다. 창이 오래되어 열리고 닫히는 게 잘 되지 않는데 창을 바꾸고 싶고, 지붕은 비가 새기 전에 낡은 곳이 있다면 미리 보수하고, 그때 가서 고생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며 내 대답을 기다리셨다.
어르신에게 이런 일에 어울리는 분들이 계신데, 다음 주에 그분들과 시간 맞추어 한 번 더 오도록 하겠다며 맛있는 커피 주셔서 감사하다는 이야기로 인사를 나누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오늘은 오후엔 늦둥이 4살 어린이의 엄마와 가족들을 만나기로 한 날이다. 만나기로 한 오후 2시가 넘어 4시가 다 되어야 도착할 수 있다며, 미안한 목소리로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신다.
˝네 선생님 기다릴 테니 천천히 살펴오세요˝
덕분에 이정원사 집에 잠시 들를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보너스 같은 시간이라고 할까? 다시 사무실에 들어가기도 그렇고, 어디 커피집에 들러 혼자 앉아 있기도 애매한 시간이다.
˝이정원사님 오두막에 커피 한 잔 하러 다녀가도 되겠지요?˝
반갑게 맞이해주는 정원사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들리고, 웃음 진 눈매와 동그란 뿔테 안경이 떠오른다.
조금 쌀쌀한 날씨에 내려주는 정원사의 커피 맛이 참 좋다. 가을의 시간과 어울리는 커피를 내려주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좋은 친구가 있어 고맙다는 생각도 함께 든다.
˝케냐 피베리를 내리고 있어요. 아시죠? 피베리는 커피콩이 좀 특별하잖아요. 옛날에는 변종같이 생겨서 버려진 일도 있다고 하네요. 생김새가 일반 원두하고는 조금 다르기는 해요.˝
오늘 만나기로 한 늦둥이 아이의 엄마는 어떤 모습일지 머릿속에서 이미지를 그리며 정원사의 커피 한잔을 입에 담았다.
˝음 좋아요. 산미도 남도, 묵직하게 향이 입안에 오래 남는데요. 오늘은 왠지 깊은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낮에 마신 프렌치프레스의 묵직한 향과는 다른 깔끔한 산미가 하루의 분위를 새롭게 바꾸어준다.
< 저는 그 떫은맛을 살리기 위해 과테말라를 선택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없애는 포인트를 목표로 하는 것 같습니다. 다이보 선생의 커피집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