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의 큰 도화지

“땅에 1:1로 그리기"

by 빵굽는 건축가

아침 일찍 시작되는 건축현장은 독특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실내가 아닌 야외를 무대를 하는 점, 펜과 종이 대신에 톱과 망치, 장비 같은 큰 도구들, 혼자가 아닌 호흡을 맞추는 ‘사람들’, 이런 요소들이 현장에 생생함을 더해 줍니다.

오늘은 기초를 놓기 위한 터파기를 하는 날입니다. 포클레인 장비가 들어오고, 시간에 맞추어 레미콘이 들어오게 됩니다. 공사를 시작하고 커다란 기계소리를 내는 포클레인은 흙을 파고 그 사이 현장 식구들은 높이를 측정하는 레벨기와 스타프라고 하는 긴 알루미늄 막대 자로 기준점이 되는 높이들이 나올 때까지 측정을 거듭하게 됩니다.

“종이 위에 그리는 그림 말고 큰 도화지를 땅에 그려서 기준을 잡는 일이죠”라는 현장소장의 말에는 어딘지 자부심마저 느껴집니다. 사무실에 앉아서 아무리 그림을 그려도 결국에는 땅 위에서 1:1로 그려내지 않으면 현실성이 없는 상상으로만 끝나고 마는 일입니다.

승현이네와 황 선생님 댁 같이 평지에 집을 짓는 경우는 땅의 높낮이와 건축과의 관계에 어려움은 없습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error’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경사진 땅의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도로, 건축, 땅의 중심이 될 기준선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계획과 달라질 수 있으니 경사진 땅의 터파기 작업은 평지보다 세심한 준비와 도면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레미콘(콘크리트) 타설 하는 날, 비가 오니 일하는 티가 좀 나네” 라며 너스레를 떠는 현장 소장도 비를 맞고 있습니다. 원하는 위치까지 땅을 내리고, 도화지를 대신할 수 있는 버림 콘크리트를 치는 중에 가벼운 비가 내립니다. 비 오는 날 콘크리트를 타설 하면 품질이 저하되지 않느냐는 질문도 가끔 받지만 오늘처럼 부슬비나 가랑비가 올 때는 콘크리트가 굳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더 좋은 일입니다.

터파기와 버림 콘크리트 공사를 마무리한 현장 식구들은 “오늘은 술 한잔 제대로 할 수 있겠네”라며 뒷자리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겨울철에도 땅이 얼지 않는 깊이까지 기초가 내려가는 ‘동결심도’ 기준이 있습니다. 땅이 얼고 녹으면서 발생하는 지반의 변화로 집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늘 깊은 기초 공사를 하는 탓에 공사비가 상승하고, 공사 준비도 더 많이 해야 하지만 기초공사이니 무엇보다도 튼튼해야 합니다. 내일부터는 기준선을 잡고, 기초 철근 준비를 하게 됩니다. 오랜동안 함께 일해온 철근과 형틀(거푸집) 식구들이 들어오면 반갑게 맞이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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