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짓는 동안 건축가들은 대상과 조건에 따라 크기, 모양, 빛깔이 다른 마음이라는 형태를 경험합니다. 다른 표현을 더하자면 질감의 정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좋고, 나쁨의 위치가 아니라 그냥 우리들의쓰임이 그렇습니다.
승현이네 집 현장에 커다란 길이로 제재된 소나무가 도착했습니다. 밑둥과 끝, 중간을 톱으로 켜기만 한 듯 거칠어 보입니다. 해가 갈수록 표정이 여려지는 김 소장이 보름 전에 인천 제재소에 다녀왔는데, 그때 주문했던 대들보감입니다. 나무를 기다려왔던지, 벼르기라도 한 듯 직접 대패를 들고 면을 다듬는 김 소장의 기분은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짐작이 갑니다. 현장 소장은 10년도 더 전에 문경에서 저에게 대패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나무를 다듬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알려주었습니다. 그때 느낀 결방향으로 전해오는 냄새와 연한 색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길이 3.6미터, 폭 20센티, 깊이 45센티 정도 되는 곡이 깊고, 끝부분으로 가면서 가볍게 올라가는 모양의 대들보를 만들고 있습니다. 휘어져 올라가는 부드러움이 집안에 높이의 변화를 이끌어 오겠지요.
경사진 거실 천정에 대들보를 얹으면 중심이 생길 것이라는 김 소장의 제안으로 도면에 없던 부재가 현장에 들어왔습니다. 들보와 기둥에 이끌려 오래된 한옥을 구입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승현이네는 새로 짓는 집이고, 구조 형식도 다르지만 무게감 있는 장소를 만들고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마당에서 치목 중인 가로로 길게 놓인 나무를 마주 보며 김 소장에게 “사람들은 이게 무엇인지 알까?”
자기의 본심을 알아주기라도 했다는 듯이 웃는 얼굴로 “마-음”이라고 합니다. 나무가 마음과 동격이 된 듯합니다.
한 살 터울의 김 소장을 2006년 경북 점촌 순대국밥집 앞에서 만났습니다. 겨울이 시작되기 전 어스름한 오후 시간에 만났으니 기억을 거슬러 오르면 이 계절과 비슷했던 것 같군요. 그때만 해도 푸릇한 빛깔의 외투처럼 청년의 냄새가 났는데 이젠 잔주름으로 나이를 헤아리게 됩니다. 첫인사를 나누며 먹던 국밥의 온도는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아침 볕이 들 때 시작해서 오후 볕이 저무는 시간이 되어서야 치목을 마친 김 소장의 마음은 이미 승현이네 거실 천정에 걸려있어 보입니다.
'오브제'라고 하지요? 그 장소에 무엇인가를 걸고 싶었는데 조명으로는 약한듯해서 도면 자리에 동그랗게 question 표시만 해놓고 “조금 더 두고 봅시다”라며 미루어 놓았던 숙제가 김 소장의 발품과 손맛으로 풀렸습니다.
나무를 구하기 위해 신대림 제재소에 전화를 하고, 파란색 사인펜으로 여러 차례 그림을 주고받았습니다. “예 사장님 두께랑 깊이는 그 정도면 되겠지요? 구할 수 있겠죠? 너무 드러나지 않으면 좋겠어요. 없으면 허전하고, 있으면 든든한 정도? 일정도 맞아야 할 텐데 부탁드려요 ” 건축 쟁이들은 시인처럼 은유(metaphor)를 즐깁니다. 제재소 사장님도 시인이라 김 소장의 뜻을 알아듣고 그에 맞는 화답을 보여주신 셈이죠.
그나저나 다른 집 식구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될 이 대들보는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요?
건축에는 공장에서 제작되는 표준화된 공산품과 다르게 ‘틈’이 있습니다. 똑같지 않아도 되는 여유 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앞뒤가 딱 맞는 에누리 없는 도면과 다른 현장만의 느낌과 치수가 있습니다. 도면과 현장, 그사이에 건축주와 건축가들이 화학적 결합을 이루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틈’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종이 위에 그려진 공간의 깊이는 현장에 세워지는 장소의 분위기를 100% 그려낼 수 없기도 하고, 건축가의 온도 또한 다릅니다. 덕분에 빡빡하지 않은 여유도 생겨납니다. 집주인도 모르고, 도면에도 없었던 일이지만 집 짓는 장소에는 홍차를 우릴 때 올라오는 차향과 비슷한 구석이 있습니다. 잎차의 종류와 찻물을 주고받는 사람에 따라 다른 맛을 내어주듯이 집도 사람과 장소의 분위기에 따라 살핌의 폭이 넓습니다. 순대국밥 같은 따뜻한 온도가 승현이네에게도 전해지겠지요?
여러분은 식탁에 모여 팔짱을 끼고, 고개를 들어 천정을 보면 무엇이 보이는지요? 우리 집엔 10년 전에 김 소장이 걸어놓은 평행 사다리처럼 펼쳐진 육송 장선이 천정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