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된장 레시피

1년에 12번은 기본. 2020년 1월에

by 빵굽는 건축가

1년에 12번, 공식적인 마을회의가 열리는 횟수입니다. 두 번의 마을 행사 겸 회의가 있고 열 번은 일상적인 회의입니다. 우리 동네 식구들이 입주해서 함께 살기 시작한 것을 기념하는 입주 기념일이 있는 4월과 처음 만남을 기억하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 행사가 두 번입니다. 특별한 날을 기억한다는 일을 두고 “뭘 그리 시시콜콜 다 챙기느냐”라고 할 수도 있지만 반복과 꾸준한 지속은 우리들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왜 동네에서 마을살이를 하게 되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깊은 바닥에 묻혀있던 초심을 줄줄이 끌어올리는 기억의 작동이라고 할까요?


이번 달 마을회의에서는 4호 누님 댁과 우리 집이 식사 당번을 맡았습니다. 이사 온 후 7년 간은 마을 사람들이 함께 식사 준비를 하다 식사 당번을 정한 것은 1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는 일이 그런가 봅니다. 처음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준비를 하는 사람들과 준비를 하지 않는 식구들로 나누이게 되고 각 집에서 음식을 하나씩 준비해오다 보니 음식의 가짓수가 다양해서 좋기는 한데 어떤 날은 음식이 넘치고, 어떤 날은 김치 종류만 나오는 일들이 생기면서 누군가 제안을 했어요. “우리 식사 당번을 정해 보면 어떨까요? 한 집에서 준비를 하면 쉬운 일이 아니니 두 집에서 준비하고 설거지까지 모두 마무리하는 거 어때요?” 지금껏 생각하지 못한 제안에 잠시 동안 어떤 것이 편리한 것인지 머리를 굴리던 기억이 있습니다. 회의 중에 나온 제안을 두고 염려를 하는 사람도 있고 “일단 한 번 해보고 안 좋으면 멈추면 되지 뭘”이라는 행동파도 있었습니다. 1년을 두고 본 결과는 모두가 만족을 하고 있습니다.


1년에 두 세 차례 식사 준비를 하면서 가벼운 반찬은 각 집에서 가져오도록 하고 중심 요리는 당번을 맡은 두 집에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시작 전에 이런저런 염려 섞인 목소리들이 있었지만 지금 반응은 “음식을 대접받는 것 같아 좋아요”, “새로운 요리들이 만들어져 나오니 음식점에 온 것 같군요”, “설거지를 안 해도 되니 그것도 좋아요” 식사 후 설거지와 그릇 정리는 늘 하던 분들만 하던 문제점도 해결이 되었거든요. 지금은 밥 당번을 맡은 집이 재료 준비부터 밥하기, 음식 만들기, 설거지 마무리까지 분주하게 움직이는 덕에 모두가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음식 솜씨를 자랑하며 나타난 삼치찜, 소머리 국밥처럼 기억에 남는 음식도 있고, 제가 준비한 인도 정통 카레, 아내가 이번 달에 내놓은 강된장과 시래기 미역밥도 기억의 레시피라고 할까요?

아내는 마을회의가 있기 이틀 전부터 재료를 준비하고, 당일 날 오후에는 시래기를 불리고, 삶고, 껍질을 일일이 벗겨내고, 미역은 불리고, 30인분의 밥솥에 쌀을 씻어 시래기와 미역을 같이 섞어 밥을 하였습니다.

강된장은 아내의 요청에 따라 칼질을 좀 하는 제가 표고버섯, 대파, 감자, 멸치를 볶고 잔썰기를 하여 적절한 때에 재료들을 넣고 조린 후 된장을 넣는 일까지 저의 몫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책에서 레시피를 보고 음식을 만드는 과정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중간중간에 무시할 수 없는 강된장의 노하우를 가진 아내는 내공 있는 살림꾼이었습니다.


pimg_7184471112452614.jpg 식사 당번 엄마 아빠와 함께 김치전을 지지는 딸아이 모습이 숙련된 요리사의 모습과 다르지 않지요


마을회의를 마친 후 시작된 저녁식사는 늘 시끌 시끌합니다. 중학생이 된 동네 청소년들은 참여하는 비율이 작아지더니 요사이는 따로 밥을 차려먹기 시작했는지 얼굴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아직 초등생인 딸아이를 포함해 세 명의 초등생만 어른들과 함께 밥상을 차리고 있습니다. 딸아이도 중학생이 되면 자기 취향에 맞추어 따로 먹겠다 싶더군요. 그때는 어쩌면 어른들만 남게 될 텐데 어떻게 해서든 아이들도 참여할 수 있는 묘책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식당 주방 수준의 조리시설이 갖추어진 주방에서 밥을 나누어 담고, 강된장을 상마다 돌리고, 밑반찬을 놓고, 오늘처럼 춥고 눈이 온 날 막걸리랑 잘 어울리는 김치전을 돌리고 나니 한상 가득 음식이 차려집니다. 서른 명 가까운 동네 식구들이 밥을 먹는 내내 시래기밥과 강된장 칭찬을 하느라 입에서 밥풀이 튀더군요. 아내의 표정도 행복 만점에 가까운 미소로 변하더군요. 식사를 마친 동네 아줌마들이 아내의 곁으로 모여들어 질문을 합니다. “레시피 좀 알려줘”라는 소리에 더 의기양양해진 아내를 두고 저는 설거지를 하러 갑니다. 오늘 음식에는 기름기가 거의 없어서 설거지가 수월합니다.


한 식구가 된다는 말은 이런 것 때문이겠지요. 설거지통에 물을 담고 달그락 거리며 설거지를 하는 동안 동네 아줌마들은 까르륵 거리며, 오늘의 레시피에 함성을 지르는 모습을 곁눈질로 보고 있자니 이렇게 살고 있는 이 겨울이 참 따스한 계절이다 싶습니다. 여름에는 더워서 붙어 앉으라고 해도 떨어지는데, 추운 날 옆에 바짝 붙어 앉아 고개를 끄덕거리는 동네 아줌마들 덕분에 저도 마음 따뜻한 겨울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설거지를 마치고 나니 남겨둔 배를 새로 깎아 쟁반째 내밀어 주는 3호 누님의 마음씀에도 행복해집니다. 강된장 레시피의 진짜 숨은 맛은 손된장이라고 귀띔해 주었는데 동네 식구들도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겨울은 지나갑니다.


비싸고 좋은 고귀한 것을 소유해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만족할 줄 아는 게 행복이라고 하는데 저는 이 겨울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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