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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굽는 건축가 Jan 06. 2021

소박한 송년모임

우리 방식의 네트워크로 연결된 안성

(2019년 12월 19일)


“그래 이렇게 소박하고 촌스러운 송년회가 좋아, 세상은 많이 세련되고 멋져서 부담스러운데 시민모임이 좋다.”

“네가 그렇게 이야기해주니까 고맙다, 조심히 가고, 또 보자”


1년에 한 번 열리는 송년회 모임을 마치고 웃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계단을 내려오기 전에 마무리 인사를 나누며 건넨 인사말입니다. 


시민모임 송년회는 참석 조건이 있습니다. 집에서 한 가지씩 음식을 준비해서 가져가는 것입니다. 10년 넘게 참석하지만 올해는 무엇을 해가야 할지 고민도 되고, 해마다 올해의 음식을 투표로 뽑아서 선물도 주니, 은근하게 남들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많을 때는 30가지가 넘는 일품요리들이 테이블에 장식되고, 음식의 이름과 특징을 포스트잇에 적어 놓으면, 회원들이 먹어보고 맛있는 음식을 찾아내어, 그 자리에서 음식을 평가받고 등수대로 상도 줍니다. 


음식 준비는 대부분 엄마들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 집은 예외라고 해도 될 만큼 대외적인 행사에 나가는 음식은 대부분 제 몫이 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중에 몇 가지를 꼽아 보자면 들깨강정, 카레, 팥죽, 호박죽, 스파게티 정도입니다. 제가 만든 음식을 맛본 분들의 평가가 나쁘면 그만두었을 텐데, 요리사도 아닌 ‘아빠’라는 존재가 음식을 만들어가서 그런지 항상 추가 포인트 점수가 있습니다. 가산점 같은 것이라면 더 어울리겠어요. 아빠들이 만들어가는 경우가 흔치 않아서 그런지 아내가 큰 소리로 “남편이 만든 음식”이라고 이야기해주면, 부러움, 기대, 궁금함이 가득 찬 얼굴들로 음식 맛을 봅니다.


그동안 가장 호평받은 음식을 하나 꼽자면 들깨강정입니다. 어려서부터 들깨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시골에 온 이후로 들깨를 얻을 기회가 잦아지면서 시작한 깨강정 경력은 15년이 넘어갑니다. 추운 겨울에 주로 만들어 먹으니 늦가을에 추수해서 겨울 동안 신선하게 먹을 수 있는 오메가 3이 풍부한 고소한 음식입니다.  


들깨강정을 먹어본 지인들의 '맛있어요' 평가는 저로 하여금 요리를 계속하게 만듭니다. 강정 만드는 방법은 지역에 사는 ‘두레생협’ 이사장님에게 직접 전수받은, 굳이 족보를 따지자면 괜찮은 분께 배운 것입니다. <밭일 1시간, 낮잠 2시간>의 저자인 1925년생 히데코 할머니의 이야기를 보태어 보자면 "우선은 먹어보는 거예요. 나와 가족에게 맛있게 느껴지는지 어떤지, 요리는 배우는 것보다 반복해서 자기 혀로 맛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실은 올해 준비해 간 음식은 ‘인도 정통 카레’와 발효빵입니다. 카레를 좋아하고 인도 여행도 몇 번 다녀온 경험이 있어, 굳이 ‘정통’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 같기는 합니다.


“시민모임 사무국이에요. 올해 준비할 음식은 어떤 것인지 알려주세요”

“네 우리 가족은 인도 정통 카레와 천연발효빵을 준비해 갈게요”


송년회가 있기 하루 전부터 닭가슴살, 노란 인도 달콩, 감자, 당근, 양파, 강황가루를 준비하고, 달콩은 물에 담가서 10시간 정도 불려놓고, 감자와 당근을 먼저 넣어서 약한 불에 익히고, 양파는 따로 볶았습니다. ‘델리 마마’ 사장님이 알려준 인도 정통 카레의 핵심은 “양파를 달달하게 볶아 내고, 달콩을 부드럽게 익히고 섞어내는 것”에 있다는 노하우를 그대로 반영했습니다. 역시 음식은 먹어봐야 그 맛을 낼 수 있는 게 분명합니다. 차례대로 재료를 섞어주고 약한 불에 1시간 정도 우려 주니 재료에서 육수가 배어 나와 인도향이 나는 진한 맛이 나옵니다. 노란색 인도 카레는 색이 참 곱고 먹음직스럽습니다. 아침에 구운 발효빵에 카레를 찍어 먹어도 좋고 고슬고슬한 쌀밥에 올려 비벼먹어도 괜찮습니다. 


많은 음식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포스트잇에 적었습니다. ‘인도 정통 카레, 앉은뱅이 통밀로 구운 천연발효빵’,  빵과 인도 카레를 홍보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하게 기분이 떨립니다. “올해는 틀림없이 상위권에 들 거야”라는 귓속 말이 환청처럼 울립니다.

두세 번을 먹는 모임 회원들도 있고, 빵은 언제 시작했는지, 직업을 바꾸었냐고 정색을 하며 묻는 분들도 계시고, 남는 카레와 빵은 가져가겠다고 하는 분들이 있으니 솜씨가 나날이 다듬어져가고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맛도 좋고, 평가도 괜찮았는데 올해는 음식평가를 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예년에 과열된 분위기로 인해 속상해하는 회원들이 많아서 올해는 맛을 즐기고, 송년회 행사만 진행한다고 합니다. 허탈하기도 하고, 기대했던 마음만큼 조금 그랬습니다. 

공식적인 순위는 없었지만 딸과 아내는 이번 카레와 빵이 정말 잘 되었다고 크리스마스이브 행사 모임 때도 카레를 준비하자고 합니다. “그래 한 번 생각해 볼게요” 


<도시는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의 저자 '에릭 클라이넨버그'는 지역사회의 구조 중에 사회적 인프라 (social infrastructure)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교류하는 방식을 결정짓는 물리적 공간 및 조직이 어떠한지에 따라 삶의 질에 차이가 나는 것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제가 고향이 아닌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도록 도와준 풀뿌리 모임 중에 한 곳이 '안성천 살 리가 시민모임'입니다.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다양합니다. 지역사회를 위해 일하는 시의원, 시민활동가, 의료생협 의사, 정당인, 약사, 목수, 학교 선생님, 협동조합 활동가, 평범한 회원들입니다. 이들 가운데 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우리 방식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있는 샘이죠.  


익숙한 공간, 익숙한 얼굴, 흉이 되지 않을 만큼의 이야기들, 같이 먹어가는 나이, 어느새 훌쩍 커버린 아이들, 주름진 얼굴의 사회자, 학생 때 마이크 좀 잡아본 사람들과의 모임, 서운산 자연학교 활동과 하천 살리기 활동사진이 영상 속에서 보이는 동안 저의 한해도 뒤돌아 봅니다. 

올해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빵맛은 점점 깊이를 더해가니 실력도 늘어난 것 같고, 빵팬도 생기기 시작하니 기분도 좋습니다. 올해 잘한 일 중에 하나가 빵을 배운 일입니다. 


올해는 참가자가 조금 줄었어요. 아쉽기는 해도 준비한 선물을 많이 받을 수 있어서 좋았죠. 제 생각에 올해의 음식 왕은 고등어 묵은지 조림입니다. 많이 속상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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