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땅 위에 살고 있나요?

by 빵굽는 건축가

언제까지 내가 직접 모형을 만들 수 있을까요? 90년대 중반에 설계사무실에 입사해서 처음 주어진 일은 연필을 깎고, 제도판에 앉아서 예전 작품을 베끼는 일이었습니다. 선배들이 두 손과 검은 연필, 투명 삼각자, 제도판 위에 흐릿한 트레이싱지를 깔아 그린 도면들입니다. 교차하는 직선과 곡선, 정교한 치수와 글자가 박힌 푸른 청사진은 초년생 시절 저의 건축 교과서였던 샘이죠. 도면집에 그려진 선들과 글자 한 줄까지 베끼다 보면 평면이었던 종이는 제 머릿속에서 공간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장소가 되어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몇 개월의 수습 기간이 끝나고 저에게 주어진 진짜 임무는 모형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도면대로 모형을 만드는 일은 평면에 갇힌 선과 선, 면적만 있던 곳에 높이를 부여하고 부피가 있는 형태를 만드는 일입니다. 마분지와 켄트지, 우드락, 발사라고 불리는 얇은 종이류와 스티로폼, 나무 판재, 본드를 이용해서 스케일에 맞춘 벽면을 잘라내고 창틀을 오려냅니다. 창틀을 오려낼 때는 창이 뭉개지지 않도록 집중을 해야 합니다. 의자에 앉아 벽면을 돌려가면서 창틀을 만들고, 제 위치에 벽을 세우는 작업을 반복하면 지붕을 올릴 때가 됩니다. 스터디 목적으로 작업할 때는 몇 시간 만에도 모형을 만들 수 있습니다.


모형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기본 디자인을 바탕으로 전체적인 느낌을 보기 위해 검토용으로 만드는 스터디 모형은 비율과 덩어리의 느낌을 보려는 것이기 때문에 잘 만드는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스터디를 마치고 구체적인 형태를 띤 모형은 의뢰인에게 설명을 하기 위해 만드는 경우입니다. 이해하고 설득을 목적으로 하는 작업에 착수한 것이죠. 형태의 구성과 느낌을 보던 것과는 다르게 창도 표현되고, 땅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장소의 쓰임도 나타날 수 있도록 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다음은 공사를 앞둔 시점에 만드는 완성된 모형입니다. 정확한 도면을 바탕으로 만드는 만큼 느낌으로 끝나서는 안 될 일입니다. 구체적인 치수와 위치들이 표현되고, 재료의 종류까지도 표현이 될 수 있도록 꼼꼼한 작업을 필요로 합니다. 1:1 건축물과는 느낌이 다를 수 있지만 최대한 현실의 건축물과 유사한 구성을 목적으로 만들게 됩니다. 지금은 컴퓨터 작업으로 정교한 질감을 갖춘 표현이 가능하지만 저의 초년생 시절에는 손작업 모형에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바쁘게 움직이던 그 시절에 손으로 만든 주택들과 문화시설, 종교건축 모형은 저에게 치수 감각과 덩어리의 느낌을 선물로 남겨주었습니다.


건축 작업 중에는 단계별로 크기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도면을 그릴 때, 모형을 만들 때, 건물이 올라가는 현장에서 느끼는 치수의 감각은 모두 다릅니다. 도면을 그리거나 모형을 만들 때는 내 손과 눈 안에 모든 장소들이 경험되고, 들어오게 됩니다.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커다란 시선이라고 할까요? 반면 현장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일은 바닥재를 확인하는 정도뿐입니다. 거인의 시점에서 비로소 제 몸의 크기로 돌아온 것이죠.


이른 아침부터 밤 12시가 다 되도록 모형을 만들 때는, 램프의 요정 ‘지니’가 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줄곧 했습니다. 물론 그랬다면 저의 존재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모형을 만들면서 배우던 장소의 크기와 연결되는 숫자의 감각이나, 건축물과 땅이 만날 때 드러나는 공간의 깊이감 같은 것도 배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니’가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으니 지금 생각하면 건축주와 선배들에게는 제가 램프의 요정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가평 별장의 디자인이 마무리되고, 공사를 앞둔 모형을 만들고 있습니다. 가평 별장은 땅이 본래부터 갖고 있던 경사의 흐름이 높은 축대로 인해 사라진 땅입니다. 경사진 땅을 평평하게 쓰는 방법은 축대를 쌓아 단을 만들 수는 있지만 주변 땅과의 관계는 끊어져버립니다. 높은 축대가 있는 경사지 땅에 어떻게 하면 본래부터 갖고 있던 대지의 분위기를 찾아낼 수 있을지 조합의 디자이너와 현장소장과 함께 고민했던 흔적이 모형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경사진 토지가 평지의 땅보다 넓은 면적을 이용할 수 있고, 다양한 높이를 체험할 수 있다는 간단한 수학공식을 집을 지을 때는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건축현장뿐만 아니라 디자인 작업에서도 기본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직각삼각형의 밑변과 빗변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같은 길이지만 높이가 있는 측면에서 보면 경사진 빗변의 길이가 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땅으로 이해하면 그만큼 쓰임이 많아진다는 표현일 뿐만 아니라 장소의 쓰임과 건축의 구성도 높이에 따라 다양한 즐거움을 가져올 수 있게 됩니다.


경사진 땅의 쓰임을 건축가들이 잘 알고 있으니 축대로 인해 사라진 장소의 관계성을 가평 별장에서 다시 살려내려고 몇 가지 건축적 장치를 해두었습니다. 주말 아침에 모형을 만드는 동안 현장소장은 느릅나무와 산뽕나무의 위치를 중심으로 높이 산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모형이 만들어지고 있을 뿐인데 열기가 오른 김 소장은 땅 정리를 마치고 마당과 깊은 처마의 높이를 다시 계산하고 있습니다. 건축가들에게는 모형을 만드는 일이 어떤 놀이보다도 재미난 일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어 지는군요. 당신의 집은 어떤 땅 위에 지어졌을까요?


가평 별장에는 오래된 느릅나무와 산뽕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아끼던 나무 덕분에 집에 중심이 잡히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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