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린 선풍기에 반사된 기억의 빛

by 빵굽는 건축가


대학시절 배를 타고 여행한 경험이 있습니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시작한 크루즈 여행은 홍콩, 베트남, 스리랑카처럼 겨울이 없는 항구를 찾아다녔는데요. 가는 곳마다 모양도 크기도 다르지만 같은 원리로 움직이는 날개가 큰 선풍기를 볼 수 있었죠. 짐작하겠지만 거꾸로 매달린 천정형 선풍기입니다. 오래되어 색이 바래고 칠이 벗겨진 십자 틀로 된 나무 창과 유리면, 부유하는 공기로 가득한 실내에, 늦은 오후 빛이 머리 위에 들고, 비틀린 선풍기 날개에 부딪친 빛의 미립자들이 제 주위를 감싸더군요. 실링팬의 존재와 쓰임, 여행의 빛이 새겨졌다고 할까요? 건축가의 길을 찾던 청년은 먼 나라에서 만난 풍경을 기억 속에 차곡히 담아두었나 봅니다. 다락이나 오두막을 갖고 싶은 사람들의 소망처럼 저에겐 ‘실링팬’을 달 수 있는 높은 지붕이 필요졌습니다.

실링팬은 보기에도 그럴듯하고, 요즘처럼 지붕면을 따라 천장도 높아지는 추세엔 장식품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에어컨 냉매가스를 이용하는 여름뿐만 아니라 위로 올라간 따뜻한 온기를 아래로 내려줄 필요가 있는 겨울에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기능과 디자인도 다양해졌고 실링팬(ceiling fan)을 원하는 건축주들도 늘고 있습니다. 그동안 에어컨의 대안으로써 추천만 하고 써본 적은 없어서, 가본 적 없는 여행지를 귀동냥으로만 설명하는 것 같아 허전했었는데, 마음 한 구석에 “언젠가는 나도”라며 때를 기다려왔습니다.

지난가을 작업실 1층 두 곳과 2층 한 곳에 실링팬을 매달았습니다. 30도 각도자의 빗변 모양을 한 천장에 어른 양팔을 벌린 만큼 긴 날개의 실링팬을 설치했습니다. 바람과 온도를 조절해 주는 기능에, 높은 곳에서 팔랑거리는 움직임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스리랑카 고원지대 '캔디'의 마을 공회당(커뮤니티)에서 만났던 색만큼은 아니지만 석양이 드는 늦은 오후엔 벽과 천장에서 잠시나마 그림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공기의 무게만큼 노랗고 깊은 색이 대공에 매달려 돌아가는 날개와 만나면 태양광선을 미주알고주알 그려낸 인상주의 화가의 캔버스처럼 작업실 벽면에도 색이 일렁거립니다.


건축가들의 작업실은 언제나 '무엇을 만드는 시간'으로 진행형입니다. 보이나요 왼쪽 천장에 매달린 실링팬!


짓고 있는 집도 볼 겸 다 만들어진 집모형을 보러 왔던 황선생은 천장에 달린 실링팬을 보면서 “우리 집도 설치할 곳이 있나요?”라며 호기심을 보입니다. 아쉽게도 황선생 집 거실과 봉당은 필요한 만큼의 높이만 있어, 마땅하지 않았습니다. 낮은 천장에 쓸 수 있는 실링팬도 있지만 기다란 금속 막대에 달린 날개의 매력은 느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안방 천장이 높아서 설치할 수 있긴 한데, 소리에 민감한 황선생이 공기를 가르며 내는 ‘윙윙’ 소리를 즐겨할지 모르니, 안방 이야기는 하지 않게 되더군요.

2층 작업실에서 가로로 길게 난 창을 넘어 외벽 공사를 하고 있는 두 집을 봅니다. 본다고는 하지만 재료의 고유한 진동만으로 망치질을 하는지 드릴로 구멍을 뚫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전기톱이 돌아가는 소리로 벽과 지붕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도 그려집니다. 공사 현장의 소리들은 땅 위에 올라가는 글자일 수도 있겠다 싶어 집니다. 마치 우리들의 소리를 문자로 적으면 한 권의 책이 되듯이 말입니다.


설계초기부터 몇가지 대안이 필요했던 승현이네 안방과 거실이 표현된 모형을 보고 있습니다. 개념이나 구성을 잡는 간단한 모형과는 다르게 공사 중에 예상할 수 있는 문제점들을 확인하기 위해 꼼꼼하게 제작한 공사용 모형입니다. 이 정도면 주방이나 가구, 내부 인테리어 점검도 가능합니다. 그만큼 서로의 이해가 빨라지는 것이죠. 종이 도면은 이 분야를 업으로 삼고 있는 이에게는 쉽게 보이지만 익숙하지 않은 기호와 도형으로 된 도면을 건축주들이 모두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도면을 보며 설명을 들을 때 고개를 끄덕인다면, 이해한다는 뜻보다는 “건축가가 모두 알아서 해주겠지”라는 믿음의 징표일 것입니다.


형태를 이해하는 도구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스케치와 도면, 투시도와 조감도, 모형입니다.

제 경우는 손 스케치와 도면, 모형을 주로 이용합니다. 컴퓨터로 정리한 그래픽은 시각적인 매력은 있으나 눈으로 보기만 할 뿐 크기의 정도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림은 눈으로 보는데 그치지만 모형은 관찰자의 위치에서 손으로 만지고 전체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납작한 도면에서는 볼 수 없었던 높이와 체적의 크기만큼 집과 장소에 대한 이해도 깊어집니다.


황선생의 집 모형, 깔끔은 건축주의 성격만큼 정갈한 주택이 만들어지고 있네요. 그래서 집은 자기 얼굴이라고 하는가 봅니다.


현장을 이끄는 김 소장과 디자인을 맡은 이 소장이 거실과 안방의 관계를 다시 논의하고 있습니다. 벽을 세우는 목수들도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한마디 거듭니다. “그러게 주방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안방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답답했거든” 도면의 단정함도 좋지만 실제 쓰임이 중요하기에 안방과 거실의 위치를 바꾸기로 하였습니다.

‘A’ 자 모양으로 천장이 높은 승현이네도 실링팬이 필요할 수도 있겠군요. 아직 때가 아닌지 실링팬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형에서 못 볼 수도 있으니 지어지고, 입주하고 여름을 맞이하면 그때는 어떨지 모르겠군요. 우리들 키의 두배가 넘는 천장에 큰 날개의 선풍기가 있는 승현이네 집이 그려집니다. 나무로 마감된 천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어떤 날개가 어울릴까요? 찾을 수 있다면 나무 날개가 달린 실링팬이면 좋겠군요. 여러분도 언젠가는 천장에 선풍기를 달고 싶어 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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