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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굽는 건축가 Feb 28. 2021

가족이 머물 장소는 어디에 있나요?


주말을 이용해 딸아이는 4DX(영상에 따라서 의자가 앞뒤로 움직이고, 바람과 물을 뿌리는 전용관)로 겨울왕국 2를 보고 싶어 하고, 저는 어른을 위한 서점을 가보고 싶고, 아내는 지인과 약속이 있어 버스를 타고 서울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딸아이와 영화를 본 후, 때 지난 점심 겸 간식으로 달달하고 매운 빨간 떡볶이와 평범한 야채 김밥을 먹고 서점을 향해 걸었습니다. 서점에 도착했을 때, 아쉽게도 무슨 이유인지 폐업을 한 상태였습니다. 청담동 한가운데서 서점을 한다는 것도 궁금했지만 입구에 ‘폐업’이라 붙은 안내장을 보니 나를 위한 가게가 없어진 듯 허탈하더군요. 내부 공간도 궁금했고, 인터넷에 올라온 방문 후기도 괜찮아서, 먼길을 다니러 왔는데 영화만 보고 말았습니다.   


아내와는 저녁 6시에 만나기로 해서 딸아이와 함께 근처에서 2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으니 애매하더군요. “아빠 건물들이 특이한데 좀 걸어 다니자”라는 제안에 2블록을 걸어 다녔을까요?. 특이한 장난감 가게, Bakery, 음식점, 패션 매장의 개성 있는 출입구와 정면 파사드(facade)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보기 좋은 것과 생활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생각하며 골목길을 걷다 발견한 카페 겸 Library가 있어서 들어가니 ‘000 card membership’을 가지고 있는지 묻더군요. 홀에서 나는 음악소리와 주변 소음 때문에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해서, 귀를 가까이하고 두 번을 물은 후에야 신용카드사의 멤버십을 갖고 있는 사람들만 이용 가능하고, 특히 어린이는 입장이 안된다는 소리에 더 이상 이유를 묻지 않고 돌아 나왔습니다.

나 혼자 갔다면 그러려니 할 텐데, 딸아이가 있는데서 어린이는 안된다는 말을 들으니 야박한 서울 인심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서울 인심을 모르는 촌스럽고 과한 심술일까요?


그렇게 30분 정도 골목길 구경을 하다 추위를 피해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내부 구성이나 가구 배치, 조명 설치에 특색이 있을 것 같은 카페가 몇 군데 있기는 했는데, 딸아이와 함께 들어갔다가 다시 한번 입장 거부를 당할 것 같은 생각에 평범한 카페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가족이 누릴 수 있는 문화적 감성의 분위기를 만나고 싶었는데 그런 장소를 찾지 못했습니다. 리뷰가 좋았던 서점은 왜 폐업을 했을까요? 서점도 어린이 입장 불가는 아니었을 텐데요?  


카페에서 딸아이는 제 스마트폰으로 20분 동안 게임을 하고 저는 줄이 없는 무지 노트에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 눈이 의식되더군요. 딸과 아빠가 대화는 없이 20분 넘게 각자 다른 것을 보고 있는 모습 말입니다.


저와 딸아이가 찾았던 장소는 사회학자 레이 올든 버그(Ray Oldenburg)가 이야기하던 ‘제3의 장소’인  '정겨운 공간(The Great Good Place.1983) 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했던 동네 놀이터, 벤치, 느티나무 아래, 카페, 식당처럼 집 근처에 있는 듯한 편리하고 부담 없는 장소 말입니다. 폐업한 서점의 종이 냄새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리는 아날로그적인 장소 대신에 딸아이는 검지 손가락과 두 눈으로만 연결할 수 있는 스마트폰에서 제3의 장소를 찾았고, 저는 펜을 들고 노트에 메모를 하는 것으로 ‘익숙한 장소’를 대신했습니다. 우리들 각자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는 모두를 위한 장소는 어떤 곳일까요?


한쪽에 치우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제가 살고 있는 작은 규모의 ‘안성지역’에서는 풀뿌리 교회, 시민모임 사무실, 단골 미용실, 우리밀 빵가게, 보개 도서관은 눈에 뜨이는 디자인도 없고 낡고 바랬지만 복잡한 검증 단계가 없는 친밀한 곳입니다. 두서너 시간 정도는 부담 없이 보낼 수 있는 ‘올덴버그’의  '제3의 공간'이 곳곳에 만들어지도록 저도 건축가로서의 역할을 해야겠습니다.  


카페에 앉아 있기도 지루해서 아내와 만나기로 약속한 식당에 30분 일찍 도착했습니다. 일행이 조금 늦게 도착하니 주문은 천천히 하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오늘 있었던 일들과 4DX로 함께 본 겨울왕국 2 감상후기를 6칸 그림으로 그린 후, 아이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딸아이는 5점 만점 중에 별점 4개를 주었습니다.  

편안하게 숨을 쉰다(息)는 의미의 ‘안식’이라는 이름의 식당이 가벼운 숨을 쉬게 해 주더군요. 서울 나들이를 오면 자주 들리는 곳입니다. 버섯 샐러드와  청포묵 떡볶이 2인분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홀과 분리된 화장실의 구성과, 기둥의 개수, 벽에 걸린 접시 그림들, 주방과 카운터의 위치, 단정한 가구들은 아내를 기다리는 ‘동행’이 되어주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아침에 구워놓았던 빵 냄새가 좋습니다. 이제는 발효종의 냄새가 향긋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밀가루 반죽이 손에 익는 것 같습니다. 주말 아침에는 마음의 여유도 생겨서 집안 일거리를 한 두 가지 더 늘립니다. 이번 빵 반죽에는 상업용 이스트를 0.1% 정도 넣어봅니다. 이스트가 들어가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호기심이 발동해서 참을 수가 없더군요. 몇 년 일찍 빵을 시작한 빵 선배(아내의 제철요리수업 동기생)의 몇 가지 빵을 먹어본 후로 줄곧 궁금함이 떠나지를 않네요. “상업용 이스트 1%를 넣어 보세요, 그렇다고 천연발효종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계속 발효종만 고집하다 보면 빵에 흥미를 잃게 돼요. 한 번 해보고 판단하세요”라는 빵 선배의 경험담을 듣고 나서 괜한 고집을 부렸던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솔직히 상업용 이스트가 들어가면 도덕적으로 무슨 결함이 생기는 것처럼 생각하며 거부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통밀가루 대비 0.1%의 이스트를 넣어서 반죽을 하고 냉장실에서 저온 숙성시키고, 모양을 내고 찐 고구마도 넣어서 달달한 제철 고구마 빵을 구워냅니다.

주말을 맞아 서울 나들이가 있던 토요일 아침 빵은 그렇게 0.1% 달라진 빵이었습니다.

산미가 있는 커피를 내리고, 막 구운 빵을 한입 베어 물으면서 선배의 빵과 저의 빵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저 스스로 “촌스럽기는 해도 쫄깃한 게 맛있다.”라고 하네요.


(2019년 12월 1일에)


토요일 아침 0.1%의 상업용 이스트가 들어간 발효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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