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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상순 Mar 09. 2023

내가 여기 있습니다

1. 코의 우상



    15년 전쯤 불교식 명상캠프에 참여하기 위해 고향 인근에 있는 다보사라는 절로 간 적이 있다. 가기 전에 내가 들은, 귀가 번쩍 열리는 매력적인 이야기는 <거기 가면 ‘나’만 생각하고 ‘나’만 바라보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게 사실이냐고 연거푸 물었다. 이 매정한 세상에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여자로 살아내기 위해, 나의 주의는 온통 ‘너’ 혹은 ‘우리’에게 쏠려 있을 때였다. 그런데 열흘 간 그 모든 것은 잊어도 좋고 오직 나만 생각하고 나만 바라보라니. 살면서 그보다 더 감동적인 제안은 받아본 적이 없다. 돈이 들더라도 무리해서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비용까지 무료라고 했다. 

    집안 분위기도 우호적이어서 별로 애쓰지 않았는데도 기회가 주어졌다. 어머니는 자식이 참선하러 간다며 여기저기 자랑까지 하고 다녔다. 

    그렇게 해서 참여하게 된 캠프였지만 정작 나는 명상에 관해 1도 모르는 상태였고 1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명상보다는 명상 핑계로 절에 가는 것이 삼시세끼 식구들 밥 챙겨야 하는 살림살이에 비해 신나는 일이라 여겼다. 나만 생각하고 나만 바라봐도 좋다는 곳이라니 나를 불편하게 하거나 나에게 나쁘게 할 것 같지 않았다.  

    캠프 첫날 오후 4시쯤 다보사에 도착해 여기저기 자연경관을 둘러보고 산책을 하다가 5시에 간단히 식사를 하면서 프로그램에 들어갔다. 식사라지만 딱 한 젓가락 분량의 국수여서 순식간에 입안으로 밀어 넣고 입맛만 쩍쩍 다시다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법당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은 지 10여분이 지나자 잘못 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가부좌 자세로는 몇 시간은 고사하고 30분도 버텨내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앞으로 열흘간 명상센터를 나가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라고 하는 게 싫었고 불교의 계율을 들먹일 때는 머리가 아팠다. <살생하지 마라><도둑질하지 마라>와 같은 평범한 계율이었는데 그걸 내가 지킬 수 없어서가 아니라 굳이 약속하라고 하는 것이 마냥 싫었던 것 같다. 

    두어 시간이 지났을 무렵 나는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당장 그곳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도 딱히 할 일이 없던 참이라 슬그머니 저녁 명상에 참석했다. 

    명상하는 방법이 녹음된 방송을 통해 흘러나왔다. 코 밑에다가 의식을 집중한 다음 호흡이 들고 나는 것을 관찰하라고 했다. 콧구멍 아래에서 감각이 일어나는지, 일어난다면 어떤 감각이 일어나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했다. 그 주문이 나름 웃겼지만 어린아이처럼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요소가 있었기에 기꺼이 따라 해 보았다. 20여분이 지났을 때 감각은커녕 다리만 저리고 아팠다. 방송은 이렇게 강조했다. 

    “반드시 콧구멍 주위를 탐색해야 합니다. 실제로 호흡이 들락날락하는 콧구멍 아래 혹은 콧구멍 둘레라도 좋습니다. 거기에 주의를 집중하고 어떤 감각이 일어나는지 관찰하십시오.”

    말귀를 알아들은 나는 즉각 나의 방법을 돌아보았고 잘못된 점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내가 탐구한 것은 콧구멍 아래, 실제로 숨이 들락날락하는 거기가 아니었다. 저만치,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허공에 코의 형상을 가짜로 만들어 띄워 놓고 거기에 의식을 집중하는,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코라는 실물이 몸에 버젓이 붙어 있는데도 그런 짓을 하다니, 그게 나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실물보다는 허상에 끌리고 그것을 좇아가는 내 모습이 인생살이에 대한 나의 태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아 나도 모르는 사이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슬프지만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음을 더욱 가다듬었다. 어려서 남들 다하는 뜀틀을 혼자만 못해 안절부절못할 때의 근성이 불현듯 작동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인 콧구멍 아래에다 정확히 의식을 집중해 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방송이 또다시 주의를 환기시켰다.  

    “콧구멍 아래 실재의 피부를 탐구하십시오.”

    나는 계속해서 나를 점검할 수밖에 없었기에 제대로 해내려고 노력했지만 같은 오류를 끝없이 반복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만치 닿을만한 곳에 그려놓았던 코를 좀 더 가까운 위치로 가져온 건 사실이지만 내가 관찰한 것은 여전히 실물의 코가 아니라 코라는 허상이었다. 이번에는 코 위에 또 하나의 코를 덧붙여 그려놓고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각이 일어나지 않는 게 명백한 증거였다. 참으로 교묘하고 간사하며 끈질긴 마음의 작태에 입이 딱 벌어졌다. 내 신체의 대표 격인, 임의로 발탁된 코를 보라는데 그 코와 닮은 가짜 코를 우상으로 만들고 섬기듯이 들여다본다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행동인가. 이후 열흘간 하루 열몇 시간 이상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집중했다. 나만 바라보고 나만 생각하라는 애초의 목표는 잊은 건 아니지만 더 이상 그런 문제에 상관할 수가 없었다. 오직 실물의 코와 접촉하기 위해 마음을 모으고 또 모았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모기와의 기막힌 씨름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휴식시간에 잠시만 누워 있으려 해도 가까이 다가와 앵앵거리고 어느새 내 팔뚝에 앉아 흡혈자세를 취하는 모기지만 쫓을 수는 있어도 죽일 수는 없었다. 살생하지 마라. 케케묵은 계율이라며 비웃었던 서약이 내 발목을 잡을 줄이야. 벽이며 창문틀과 기물 같은 곳에 앉아 있는, 배가 빵빵한 모기를 지켜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은 말 그대로 명상뿐이었다. 

   

    현재 내가 코의 우상을 완전히 버렸는지 어쨌는지 정확히 알 방법은 없다. 그저 추상적인 이데올로기나 관념을 믿기보다 지금 여기, 내 눈앞의 현실에 몰입하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는 것을 조금은 알아차렸다는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일 수 있겠다. 살아 있는 동안 그것을 다 버리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꼭 그래야 할 필요도 없는 거지만 지금 여기를 벗어나 허황된 생각에 휩싸일 때마다 그날의 그 당혹스러움을 상기하면서 마음을 추스르곤 한다. 그것이 내가 ‘지금 여기’로 돌아오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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