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남자들에 대한 여자들의 거짓말
남자들에 대한 여자들의 거짓말도 불온하기보다는 신기하고 재미있을 때가 많다. 특히 남녀 간에 불화가 생겼을 때 여자들은 그 남자를 지배하기 위해서도 거짓말을 하지만 그 남자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서도 거짓말을 한다.
그중에는 꽤 위태로운 거짓말도 있다. 이를테면 맞지 않았는데도 맞았다고 해서 양육권을 빼앗고 경제적으로 손실을 입히는 등 남자를 진정으로 곤경에 빠트린다. 왔던 곳으로 ‘돌아가게’ 될 그녀에게는 명분이 필요한 것이다. 환영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돌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어야 이후의 운신이 원활하다. 비단 연예인들만이 이러한 명분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사회에서는 성격차이로 하는 이혼에 대해 아직은 보수적인 시각이 잠재해 있다.
나는 주변 여성들을 관찰하다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증명받으려고 소송까지 하면서도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케이스를 본 적이 있다.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이유 중에는 상당히 놀라운 것이 있었다. 그 여성은 남성에게 실제로 얻어맞지는 않았지만 맞은 것보다 더한 폭력을 경험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겪은 포괄적인 의미의 폭력(언어폭력, 때리려고 하다가 멈출 때의 제스처, 눈 부라림 등)은 ‘맞았다’라는 단어로만 그 실상을 정확히 알릴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맞지 않았지만 맞은 것보다 더한 폭력이 되는 지점에 사람마다 서로 다르다고 알려진 지각적 느낌이 자리한다. 같은 자극원을 가지고도 그것을 느끼는 감정의 폭이 다를 뿐 아니라 ‘맞았다’의 개념까지 다른 일이 일어나다니. 어떤 사람의 손이 다른 사람의 신체에 직접 닿지는 않았어도 직접 닿아서 입힐 수 있는 피해 이상의 상해를 입히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에 답하기 전에 이것이 세상의 규칙과는 다른 여성들만의 언어라고 말해두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나 역시 그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사실은 한두 번이 아니다.
그중에서 가장 시시한 이야기 하나를 소개해 보면 이렇다.
오래전,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집을 샀는데 신축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누수가 발생했다. 분양사무실에 수차례 전화를 해도 아무도 와보지 않았고 이리저리 발뺌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안 되겠다 싶어 단단히 따질 결심을 하고 물어물어 그곳을 찾아갔다. 현관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덩치 큰 어깨들이 나타나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 집에 물이 샌다고, 어째서 아무도 와보지 않고 고쳐주지 않는 거냐고 용건을 늘어놓았다. 성격 상 나는 어느 정도 흥분하지 않았을까. 아마 나는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며 법적이고 이성적으로 따박따박 따지면서 내가 당신들로부터 경험한 것이 부당한 것 투성이었음을 환기시켰으리라고 본다. 게다가 누수에 대한 그들의 대처는 얼마나 파렴치했던가.
그런데 그때 안쪽에서 어깨들보다 더 덩치가 크고 거칠어 보이는, 어깨 중의 어깨가 나오더니 나를 향해 다짜고짜 고함을 질렀다. 그 작자가 무슨 고함을 어떤 내용으로 질렀는지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봐, 뭔데 그렇게 떠들어?” 정도의 인상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 별 내용 없는 고함소리에 나는 순식간에 기선을 제압당했으며, 수치스럽게도 그 자리에서 무릎을 꺾은 채 주저앉아버렸다.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면 천둥 번개 소리에 지레 겁을 먹고 오줌까지 싸버린 것에 해당된다.
몸의 기운을 완전히 털린 느낌으로 집으로 돌아와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마침 집에 와 있던 여동생이 어린아이를 등에 업은 채 가자며 나섰고 남동생도 따라 나왔다. 결과는 뻔했다. 셋이 갔을 때 어깨의 어깨는 보이지 않았고 그 밑의 부하 어깨들의 가벼운 호통으로도 여동생은 위경련을 일으킨 채 쓰러졌으며 키가 180cm나 되던 남동생은 어깨들의 어깨에 얹혀 맥없이 밖으로 내던져졌다.
집으로 돌아와 분을 삼킬 수 없었던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남동생은 내던져지는 과정에서 어깨들과 신체적인 접촉이라도 있었지만 여동생과 나는 신체적인 접촉이 없었던 것은 물론 쌍욕을 듣거나 위협을 당하지도 않았다. 나는 예민하기는 해도 사소한 다툼에까지 심각한 히스테리를 드러내는 성격은 아니었다. 우리는 대체로 순하고 평범하며 그만그만한 여성이라고 보면 된다(못 믿으시려나?). 그럼에도 “이봐!” 혹은 “야!”라는 한 마디와 눈 부라림에 커다란 피해를 입고 말았다. 나는 기분 때문이 아니라 몸이 털려서 오랫동안 고생했다. 누가 뭐래도 그건 상해에 버금가는 그 어떤 폭력이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생각을 도출해 냈다.
내가 누수방치가 아닌 폭력으로 이들을 신고하거나 고소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한다면 죄목을 뭐라고 적어 넣어야 한단 말인가. 실제로 상당히 많은 여성들이 배우자와 이혼을 겪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해서 같이 살았던 남자를 몹쓸 인간으로 만들고 공권력과 세금까지 낭비하게 할 수 있나 싶겠지만 이런 상황에 빠진 여자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녀들이 여기에 관해 매우 당당한 것을 알고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이 세상의 기준(남성적 언어)으로는 분명히 맞지도 않았고 처벌을 요구할 수도 없지만 또 다른 기준(여성적 언어)으로 보면 그 남자는 때린 것 이상으로 큰 잘못을 저질렀다. 왜 이런 간극이 생기는지는 비교적 분명하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발가벗겨진 채 매를 맞은 남자아이는 커서 그 아버지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것 같은 느낌으로 살아가게 될 수가 있다. 이때 <아버지는 나(아들)를 때렸다>라고만 한다면 그 아이에게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건 너무 주관적인 느낌이며 모함 아니냐고?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에게 있어 (신체적 접촉 없이) 맞았다는 것은 느낌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일 때가 있는 것이다. 그(그녀)는 단지 느낀 게 아니라 보았던 것이다. 어떤 일그러진 커다란 박쥐 몰골을 한 형상 혹은 에너지 덩어리가 목소리와 함께 자신을 덮치며 철썩 그(그녀)라는 존재를 할퀴고 지나가는 것을. 그 고통, 그 충격이 그(그녀)를 아프게 하고 신체에다 돌이길 수 없는 자국을 남긴다. 이것은 맞은 것과 맞지 않은 것 사이의 사건이 아니다. 맞았는데 어떻게 맞았느냐가 문제가 되는 사건이다.
나는 이것을 조금도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