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일단 대학만 가면 된다는 풍토가 강했다. 중학교 시절까지는 아무런 생각 없이 살더라도 고등학교에 접어들면 점점 진로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 선생님과 부모님 모두 일단 좋은 대학에 가면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항상 일단 대학에 가면 고민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에 오면 고민이 없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은 고민만 늘었다. 처음 대학에 들어왔을 때는 모의고사 시험과 수능시험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즐거웠지만, 여전히 대학교에도 고등학교 시절과 똑같은 시험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었다. 더욱이 성적이 좋지 않으면 장학금이 나오지 않아 등록금에 큰 부담이 생기기도 했다.
대학에만 오면 뭔가 크게 달라질 것 같았지만, 늘 시험 준비를 하느라 내 인생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사는 건 변하지 않았다. 대학에 와서 다시 한 번 ‘내가 정말 대학에 온 게 잘한 일일까?’는 고민부터 시작해서 ‘내가 대학에 왜 왔지?’라는 질문마저 하게 된다. 우리는 왜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 걸까? 뒤늦게 사춘기가 찾아온 걸까?
나는 그 이유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일단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을 나오지 않고서는 제대로 사람대우를 받기가 어려우니 내가 대학에 가서 뭘 하고 싶은지, 왜 이 대학에 가야 하는지 이류를 생각해보지 않았다. 일단 좋은 대학이니 선택하고, 내 성적에 갈 수 있는 최선에 맞춰서 우리는 대학에 진학했다.
우리는 42.195km를 뛰는 마라톤에서 겨우 3km 가량을 온 것에 불과한데, 3km를 뛰면 목적지가 보인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아직 목적지를 보기 위해서는 더 멀리 뛰어가야 하고, 이미 많은 사람이 앞을 향해 뛰어 나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마라톤에 참여해서 열심히 스타트를 끊었지만, 골인 지점은 물론 왜 마라톤에 참여했는지 알지도 못한다.
우리가 이 마라톤에서 스타트를 끊기 위해서 소비한 것은 꽃다운 청춘이라는 시간과 연 천 만 원에 이르거나 넘는 등록금과 생활비다. 그 이외에도 자질구레한 것을 모두 합한다면 우리는 오로지 대학에 들어와서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서 지금도 많은 것을 소비하고 있다. 단순하게 대학만 바라보고 왔는데, 대학에 들어오니 정해진 길이 하나도 없었다.
대학에서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종종 ‘왜 아무도 나보고 뭘 하라고 말해주지 않는 거야?’라는 괴로움을 겪을 때가 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모두가 똑같은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왜, 어떻게, 무엇을 질문을 하지 않고서도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은 모두가 똑같은 목표를 공유하지 않는다. 온전히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의 목표를 정해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단계를 하나씩 밟아가야 한다. 그것이 취업이든, 진학이든, 예술이든, 창업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이러한 고민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고민하다 우연히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대학에서 거의 모두가 공통적인 목표 의식을 두고 있는 취업 경쟁에 뛰어들어 다시 토익 책을 펼치거나 한국사 책을 펼쳐서 ‘입시 공부’가 아닌 ‘입사 공부’를 하는 것이다. 모두가 공유하는 목표는 ‘왜’라는 질문 없이 그냥 하면 되니까.
대학에서도 죽기 살기로 다시 공부에 매달리는 건 너무나 안타깝다. 하지만 학점이 좋지 않으면 취업에서도 불리할뿐더러 장학금이 나오지 않을 수 있어 등록금에 대한 부담이 적지 않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고. 이 굴레를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많은 학생이 ‘나’를 잃어버리고, ‘왜 대학에 왔지?’라는 질문을 마주하게 되면 도망치게 된다.
대학은 우리 인생의 최대 목표가 아니다. 그저 우리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작은 단계에 불과했다. 우리 대학의 한 교수님은 항상 “좋은 대학에 간다고 해서 인생 잘 사는 거 아니다. 여기 지방대에서 다니더라도 네가 열심히 하면 인생 잘 살 수 있다. 너희 선배 중 몇 명은 일본에 취업해서 잘 살고 있다. 결국 자기가 하기 나름이다.”는 말씀을 하신다.
대학은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걸 찾아서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며 틀을 다져나가야 하는 시기다. 그런데 일단 대학에 가는 게 중요했고, 대학을 졸업하는 게 너무나 우리 사회에서 중요했다. 어느 누구도 대학에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해주지 않았다. 정 대학 교육이 필요하면 이후 야간 대학을 다녀도 충분한데, 일단 대학에 와서 젊은 청춘을 보내는 것이다.
대학을 다녔던 2010년도에 들은 한 강의에서 제법 나이가 드신 중년 아저씨 한 분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아저씨께 어떻게 지금 대학에 다니게 되었는지 여쭈었더니, 아저씨는 “정년퇴임을 하고, 또 다른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이렇게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정말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랐다.
늦은 나이에 대학을 다니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때라도 분명한 목표가 있으면 이렇게 다시 대학에 다닐 수가 있다. 지금의 20대는 벌어놓은 돈이 없어 힘들게 일하시는 부모님의 손을 빌리거나 학자금 대출을 받아 빚으로 대학을 다닌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대학은 그렇게 빚을 내면서 다닐 정도로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는 걸까?
누군가는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정말 꼭 한 번 해보아야 할 질문이다.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사회에서 차별을 당하기 때문에 다닌다는 것은 너무나 비극이다. 대학이 하나도 즐겁지 않을 것이고, 대학에서 배우는 강의는 오로지 학점을 채우기 위한 강의밖에 되지 않아 자기 발전도 없을 것이다. 길게는 4년이라는 시간을 그렇게 보내는 건 아깝다.
2017년 들어서 취업이 더 어려워지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고시 공부를 하는 학생들의 사례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아무런 목표 없이 대학에 오는 것보다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고시 공부를 해서 일찍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돈을 벌면서 살다가 어떤 목표가 생겨 다시 공부를 하고 싶으면 늦게라도 대학에 다니면 되니까.
대학을 꼭 20대에만 가야 한다는 건 하나의 편견이다. 공부는 조건이 없다. 그냥 하고 싶으면 하면 되는 거다. 지금 대학에서 ‘나는 왜 여기에 있지?’라는 질문을 맞닥뜨려 방황하는 이유는 한 번도 ‘왜?’라는 질문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 잠시 하는 공부를 멈추고 그 이유를 고민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