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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후 미우 May 14. 2017

언젠가 나는 꿈을 꾸었다

04. 노지 생활 백서 02

 넌 꿈이 뭐야?, 그것도 꿈이라고 말할 수 있어?, 넌 왜 자기 생각만 하니?, 꿈은 크게 가져야 해, 꿈은 이룰 수 없어서 꿈이야, 꿈 없이 산다고 뭐가 나빠?, 꿈은 꼭 있어야 하는 걸까?, 꿈은 누가 가르쳐주는 거지?, 그건 정말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일까?, 혹시 꿈을 꾼 적이 있니? …….


 '꿈'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특히 '꿈'을 가지고 토론을 벌이게 되면 정말 해가 떠서 해가 질 때까지 이야기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티격태격 다투면서 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꿈과 그렇지 않은 꿈, 꿈을 꼭 가질 필요가 있는지에 관해 다투지 않을까?


 그렇게 우리는 누구 할 것 없이 '꿈'이라는 단어에 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내게 있어 꿈은 머나먼 존재에 불과했다. 반복되는 삶 속에서 바뀌지 않는 인간관계, 바뀌지 않는 환경. 내 주변의 모든 것이 꿈을 말하는 것보다 현실을 말하면서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그러나 새장 속에 갇힌 새는 언제나 높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늘을 나는 것을 바라기 마련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새장 속에서 주는 먹이만 먹고, 가르쳐주는 지식만 습득하고, 다른 사람이 가는 대로 따라가는 삶은 상상만 해도 싫었다. 그래서 발버둥 쳤고, 달라지고자 했고, 울었다.


 26년의 인생을 살면서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다. 인생을 살면서 '사랑과 연애' 같은 청춘 드라마에 나오는 단어를 가슴으로 이해한 적도 없었고, 인생을 살면서 절실하게 무엇을 바란 적도 없었다. 내가 바랐던 것은 오직 하나, 나를 옭아매는 새장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한국에서 20대로 산다는 것은 여러 가지 수식어가 함께 붙는다. 그리고 그 수식어에 따라 지나칠 정도로 책임감과 의무감이 붙는다. 이미 청소년 시기에 허리가 휠 정도로 짊어진 짐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늘어나면서 20대는 자유로운 삶을 생각하는 건 이상하다는 인식이 생겼다.


 나는 그런 일이 무척 싫었다. 아무 생각 없이 재수해서 들어간 대학에서 나는 바보 같이 돌아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으면서 만난 사람들처럼 하고 싶은 것을 쫓아서 '진짜 사는 재미'를 한 번이라도 가슴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에 다니면서 취업을 위해 공부를 하기보다 책을 읽으면서, 글을 쓰면서 오늘을 보내고 있다. 바보 같은 일이지만, 이 과정을 통해 나는 꿈을 꾸고 있다. 남들이 생각하기에 가소로운 꿈일지도 모르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꿈일지도 모르지만, 무턱대고 걷고 있다.


 내가 걷는 길의 도착점이 어디인지, 심지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해보고 있다. 피아노를 연주해보고, 글을 써보고, 그림을 그려보고, 사진을 찍어보고…. 그렇게 살고 있을 뿐이다. 일단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을 차례대로 하고 있다.


 지금 내 손에는 피아노, 글쓰기, 책 읽기, 사진 찍기 딱 네 개의 하고 싶은 일이 블로그를 통해 구체적인 꿈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글을 쓰는 일은 모두 블로그로 연결된다. 막연히 전업 블로거를 꿈꾸었던 옛날과 달라졌다.


 하지만 아직 불안함과 두려움이 더 많다. 주변 사람은 오직 결과만 보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 좋아했던 애니메이션 <카레이도 스타>의 주인공 나에기노 소라가 큰 무대에 도전할 때, 스테이지 요정은 '누구도 꾸지 않는 꿈을 좇는 그 어리석은 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조소인가 아니면 갈채인가?'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나는 인생이 딱 그 말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꿈을 좇는 어리석은 사람 앞에 기다리는 건, 갈채와 조소 둘 중 하나다. 성공한다면 "너 대단해! 멋진 사람이구나!" 하면서 갈채를 받지만, 실패한다면 "봐, 넌 안 된다니까. 그게 무슨 꿈이야? 그냥 평범하게 살아." 하면서 조소를 띄며 나무라니까.


 특히 '낙인 이론'이 강한 한국은 그래서 남과 다른 길을 걸으면서 도전하는 일을 더 꺼리기 마련이다. 한 번의 실패를 통해 '다음 성장'을 바라보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의 만류와 조롱으로 의지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불행한 새장으로 다시 발을 돌려버리고 만다.


 나는 그런 삶이 싫다. 비록 내가 주변에서 조롱을 받고, '그 길은 틀렸어!' 같은 말을 듣더라도 우직하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나아가고 싶다. 이렇게 산다고 행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 방식이 정답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대로 가는 게 편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냥 이대로 '나'이고 싶다. 비록 행복해지지 못하더라도, 비록 정답이 아니더라도 후회는 하고 싶지 않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한 번뿐인 인생에서 정말 한 번은 '행복하다.', '재미있다.' 두 개의 감정만큼은 온몸이 떨릴 정도로 느껴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대로 가고 싶다.


 행복과 재미는 머나먼 꿈이라고 말하지만, 가까이에 있는 꿈이라고도 말한다. 오늘에 만족하고, 미래를 불안해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덴마크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수 있게 해주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소소한 행복을 느끼면서 산다.


인터뷰 중간에 페테르센이 아들 자랑을 늘어놓앗다.,

"올해 22살인데 열쇠 수리공으로 일하고 있어요."

열쇠 수리공? 평생 식당 종업원으로 일해온 아버지 밑에서 자란 '출세'한 아들의 이미지를 떠올린 나는 솔직히 좀 의아했다. 그러나 페테르센은 되레 이렇게 말했다.

"한 번도 아들이 판검사나 의사나 교수가 되길 바라지 않았어요. 열쇠 수리공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필요하고 의미 있는 직업입니까?"

덴마크 가기 전에 만난 한국의 한 대기업 간부는 중소기업에 다니는 아들 이야기를 꺼내면서 "아비로서 참 부끄럽다"라고 했다. 또 다른 나의 지인은 직업이 의사인데 아들 이야기만 나오면 기가 죽는다. 그는 아들이 자신처럼 명문대를 나오지 않았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한다. 그래서 아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친구들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페테르센은 고등학교 동창회 자리에서 식당 종업원이고 아들이 열쇠 수리공이라는 사실을 떳떳이 이야기한다고 했다. 아들이 자랑스러운 덴마크 웨이터와 아들이 못마땅한 한국 의사, 누가 더 행복할까? 이것은 부자 관계의 차이가 아니라 노동을 바라보는 가치관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p29)


 한국은 그런 게 불가능한 나라다. 그렇다고 내 삶을 송두리째 포기하기에는 안타까운 인생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날 문득 꾸었던,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글을 쓰면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바보 같은 그 꿈 같은 일상을 현실로 만들고자 오늘도 우두커니 하늘을 바라보며 글을 쓴다.


 비록 내 글이 비아냥을 받고, 피아노 연주가 조소를 받더라도 상관없다. 아직 온몸이 감격에 겨워 떨릴 정도로 '행복하다.', '재미있다.' 같은 감정은 느껴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을 섞어가면서 나는 오늘을 살고 싶다. 내일이면 과거일 오늘이 기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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