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머리

by Mi Won


온 가족이 모여 밥 먹는 시간을 중요시 한 부모님 덕에 다양한 재료가 들어간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건 분명 축복이다. 시골 친척 하나 없는 서울 촌뜨기였던 우리에게 아버진 자연의 신비로움, 농부의 수고함, 음식 만드는 엄마의 노고에 감사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특히 일요일 아침은 홀로 끼니를 건너는 이웃 한 분과 아침을 먹었다. 주말이라 늦잠을 자고 싶거나 내가 좋아하는 반찬이 올라올 때면 심술도 부렸지만 나눔에도 예절이 있고 어려운 이웃 챙김은 정이고 도리라 하셨다.


경찰 출신인 아버진 일찍 퇴직하시고 40대에 미곡상을 개업하여 돌아가실 때까지 운영하셨다. 사업을 시작한 1970년대는 쌀이 주식이면서도 쌀을 저장하며 먹을 수 있는 집이 많지 않기에 한 되씩 또는 한 말씩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음 약한 부모님은 어린 자녀나 노인이 굶는다면 외상을 거절하신 적이 없다. 그로 인해 받지 못한 외상값도, 몰래 이사한 사람 또한 많았다. 큰 명절 때마다 외상값을 받으러 가야 할 때면 야물지 못한 아버진 엄마를 보냈고 마음 약한 엄마 또한 잘 받아 오지 못했다. 쌀보다 라면 같은 밀가루 음식이 많아진 80년대엔 손님의 수가 아버지의 머리숱처럼 줄었고 외식문화가 시작한 90년대엔 출가한 자식들 살기 바빠 모임이 뜸하듯 손님들도 뜸했다.


평소 말수가 적은 아버진 식사시간엔 유독 수다스럽고 많이 웃으셨다. 좋은 것을 가족에게 먹이기 위해 도매시장에 갈 때마다 가게에서 필요한 물건을 주문해놓고 언제나 새로 들어온 신선한 반찬거리와 절기마다 먹는 재료들을 두 손 가득 사 들고 오셨다. 가게에 필요한 물건이 없는 날에도 몸보신용 우족과 김치찌개에 넣을 돼지고기를 생일이면 쇠고기를 내가 좋아하는 생선을 사기 위해 언제나 새벽녘에 장을 보셨다. 아버진 당신이 혼자 손 크게 장을 봄으로써 엄마의 노고를, 엄마에게 사랑을 자주 표현하셨다.


뜸이라는 단어의 뜻도 모르던 아주 어린 시절 밥때가 되면 밥상에 제일 늦게 올라오는 건 밥이었다. 국과 반찬, 수저와 젓가락 모두 준비해 놓고 갓 된 밥을 가족에게 주기 위해 엄마는 우리 오 남매만 먼저 밥상에서 기다리게 했다. 전기밥솥이 없었던 그때 엄마는 몇 번씩 밥알을 입에 넣고 확인하면서 재촉하는 우리에게 아직 뜸이 덜 들었다. 고. 그러면 우린 뜸이 뭐냐 물으면 “뜸이란 기다림이다” 하셨다. 다시 밥솥을 열고 흰 김이 엄마의 얼굴을 삼킬 때쯤 엄만 뜸이 잘된 밥을 푸고, 나는 쪼르르 아버지를 모시고 왔다. 그때부터 우리의 눈은 아버지의 손이 빨리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짓궂은 표정으로 뜸을 들이는 아버지의 모습에 엄마의 눈 흘김을 받으면 “우리 똥강아지들 먹자”라며 국물 한 모금 드신다. 그때부터 우리의 수저질이 바빠졌다.


오 남매가 고루 먹을 수 있게 엄마는 좋아하는 것에만 젓가락이 쏠리지 않도록 중간중간 중재하셨다. 생선이 올라오면 반 토막씩 고루 돌아갈 수 있게 하면서 오 남매의 먹는 소리에 두 분은 벙글벙글 좋아하셨다. 엄마는 아들들의 흰밥 위로 반찬을, 아버진 딸들의 흰밥 위에 반찬을 놓아주셨기에 밥상에선 남녀차별을 받지 않았다. 하나 있다면 큰오빠의 도시락과 소풍 갈 때의 김밥 재료에서 엄마는 아들과 딸을 구별했다. 특히 큰오빠의 김밥 재료엔 불고기가 소로 들어가고 딸들의 김밥엔 어묵이 들어갔다. 그래도 형제 중 한 사람이라도 소풍 가도 오 남매의 김밥을 만드는 엄마에게 강력하게 불만을 표시하거나 아버지에게 고자질하진 않았다. 김밥과 같이 얻어먹는 사이다가 너무 맛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막내딸인 나를 데리고 군것질에 필요한 장을 보러 가는 걸 좋아하셨다. 나를 업고 전병 과자를 사러 가기도 하고 과일가게를 자주 갔다. 아무리 막내딸을 사랑해도 아버진 부주의한 어린 손으로 과일이 멍들거나 과자가 부서지는 것에 늘 조심시켰다. 값을 깎는 것을 본 적이 없고 또한 조금의 덤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아버진 소상인들의 애환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분이다. 나는 결혼 후 시장에 갈 때면 과일과 채소를 뒤적이거나 값을 깎지 않았으며, 덤을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 덤으로 받아온 찬거리 대부분은 음식쓰레기가 되기도 하고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늘 생각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오 남매의 먹는 모습을 보며 좋아하는 표정에서 부모에게 사랑받는 걸 알았고, 형제들과 나눠 먹으면서 형제애를, 이웃과 나눔을 통해 같이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것을 알아가면서 성장을 했다. 뜸이라는 것을 통해 기다림과 잘 익는 것이 꼭 밥뿐이 아니라 사람도 잘 익어야 한다는 것을 밥상머리에서 배웠다. 난, 뜸이 잘 든 자녀가 되었는지는 자신은 없다. 다만 기다림을 잘하는 게 삶이라는 것을 이해하며 살고 있다. 기다림을 통해 내려놓기도 하고, 기다림을 통해 참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이 들면 밥심으로 산다는 말의 뜻과 상관없이 같이 밥을 먹으면서 생기는 정신적 영양이 더 많은 이유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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