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홍대 연습실

by 믹스커피

막혔던 한강의 교통체증도 대화가 풀리면서 슬슬 풀리고 있었다. 기약할 수 없이 갇혀있었던 순간은 지나가지 않을 것 같이 답답했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8차선의 도로 위를 쌩쌩 달리고 있다. 나의 밀려있는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는 이렇게 8차선 도로처럼 멋지게 뻥 뚫려서 달려 나가 수 있을까. 그럼 이 순간도 여러 배우들의 인터뷰에서 빠질 수 없는 기승전결의 기를 담당하겠지. 인생 경험이 곧 연기에 자양분이 되었다는 소리를 하면서 말이지. 꿈을 포기할까 말까의 기로에 서서 변절의 마음이 들었던 것 또한 연기에 대한 열정을 따라주지 않는 안타까운 현실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장치가 될 뿐일 테니까. 그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내 안의 악마와 천사가 싸우듯이 포장된 나와 포장되지 못한 나 사이의 간극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진지한 이야기가 머쓱해졌는지, 그 뒤로는 신변잡기 적인 겉핥기 이야기로만 흘렀다. 오늘 화장실에 온수가 안 나와서 양치할 때 이가 어는 줄 알았다는 너스레로 가벼운 농담 따먹기 정도의 이야기 말이다. 다시 볼 사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금 당장 이야기가 끊어지기에는 어색한 사이. 적당히 버스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때울 정도의 성의가 있는 이야기를 서로 보여주고 있었다. 번호를 교환하고 다시 만나자고 하기엔 부담스럽지만, 각자 내리는 정류장까지는 함께할 수 있는 시한부적인 동반자로서의 암묵적인 합의랄까.


정류장을 내려 연습실로 향하는 길이 오늘따라 시리다. 오늘 은행에서 만난 할아버지의 150만 원 때문인지, 버스에서 같이 대화했던 80점 인생이라고 했던 그 은행원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연습실은 홍대라고 불리는 지역에 있다. 홍대는 과녁형처럼 만들어져 있다. 중심부에서부터 바깥으로 원을 그리면서 월세와 돈을 중심으로 그려져 있다. 중심에 있을수록 소위 잘 나가고 돈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건물들이다. 바깥으로 나갈수록 월세와 대여료도 점점 적어진다. 그래서 잘 나가다가 나락으로 내려갔다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연습실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 주로 어디에서 활동하느냐의 거점을 과녁을 보고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하다 보니 살다 보니 익히게 된 별거 아닌 인생의 노하우랄까. 그래서 어디에 있는지를 보고 그 사람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하기도 하고, 그 사람의 으스댐을 추켜 세워 주기도 한다. 과녘의 중간으로 들어갈수록 얼마나 자랑하고 축하받고 싶어 할까, 또 그만큼 바깥으로 나올수록 작아지고 초라해질까. 그 정도의 마음 쓰임은 인류애 적인 배려보다는 이기적인 나만의 사회생활 스킬이다. 내가 그럴 것 같아서. 내가 과녘의 중간으로 들어갔을 때는 마음껏 축하받고 으스대고 싶다. 그 안에까지 들어가느라 개고생을 했는데, 그 정도의 바람은 당당히 요구해도 되지 않는가. 그리고 과녘의 밖에 있는, 과녘으로 치면 2점과 1점 사이의 원의 바깥 근처에 있는 지금은 이미 내가 작으니 더 이상 누군가에게 눌림을 받고 싶진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 과녁 안에서 조차도 존재하지 못하는 점수로 인정도 되지 않는 화살이 되면 어쩌나 전전긍긍하고 있는 어제와 오늘들도 교통체증처럼 시간이 지나면 풀리는 종류의 것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연습실에 도착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극단이라고 보기엔 너무 작고, 동아리라고 보기엔 우리의 연식이 슬픈 그런 묘한 모임이다. 오디션 일정을 공유하기도 하고, 레퍼런스를 위해 서로 재능 기부의 공연을 할 때 크루로 모이기도 하는 동료들이다.


"왔어? 오늘은 웬일로 깔끔하게 하고 왔어?"

얼마전 2차 오디션 까지봤다고 3차는 지역에서 합숙오디션 본다고 했었던 중식이 형이다. 그런데 이시간에 있는 걸 보니 3차까지는 못갔나보다.

"아, 오늘 청원경찰 역할이었어. 대현이는 안보이네? 오늘은 안오나?"

"아, 대현이는 오늘은 대리기사역할이래. 그래서 밤샘촬영이야."

웃음 섞인 농담으로 서로의 안부와 상태를 은연중에 나눠본다. 대현이는 오늘 대리운전을 뛰러 갔나보다. 서로 피차 배역도 없고 역할도 없는 상황에는 이런저런 투잡들을 하기에, 그럴때는 이런식으로 얘기한다. 어느날 우연히 배우의 조연상 수상 인터뷰에서 모든 인생의 직업들이 나의 연기에 도움이 되었다는 걸 보았다는 걸 보다가 만든 우리만의 장난이다. 하필 그것을 연습실에서 모두가 오디션에 낙방한 상태에서 밀린 연습실 월세를 보증금으로 다 까먹고 접기로 한 날, 새우깡에 소주를 마시고 있을 때에 같이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 중식이 형이 약간의 취기와 함께 자조적으로 시작했던 농담이 우리끼리만의 룰이 되었다. 알바나 투잡을 뛰러갈 때 일하러 가야된다는 말조차도 자존심이 상하는 순간이 중식이 형 덕에 위트있게 바뀌게 된 것이다. 해야 할 연습이 없어서, 일을 하러가야되는 순간을 굳이 입 밖으로 상처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래 오늘 나는 청원경찰 역할을 했던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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