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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믹스커피 Jun 14. 2022

명랑한 주부의 딩가딩가 한 취업기 ( 번외:샤넬 백원장

쓰는 엄마: 다른 사람 글 바꿔 써 보기

 “띠링, 구글 어시스턴스를 시작합니다. 9월 24일 오후 2시입니다. 오늘은 화창한 날씨로 낮 기온은 26도로...” 뉴스로 시작하는 알람이 울린다. 밤 수업을 안 한지는 꽤 되었지만, 10년 넘은 학원 짬밥으로 3시 초등학생 수업에서 시작해서 새벽 2시 고3들 보충 수업까지 쳐내다 보니 이 시간에 몸이 적응해버렸다. 이거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는 날은 브런치 약속이 있거나, 백화점 갈 일 있을 때 말고는 이런 패턴이다.      

“헤이 구글, 오늘의 일정 알려줘”

“네, 오늘의 일정을 알려드립니다. 오후 3시 문탁 선생님 보강 강사 면접, 오후 4시 광교지점 학부모 세미나, 오후 5시 분당지점 학부모 세미나, 오후 6시 서초지점 학원장 저녁 회동...”     

 냉장고 문을 열어 탄산수를 꺼내 마시며 남은 잠을 쫓아본다. 학부모 세미나가 있는 날이라니 여간 신경 쓰이는 날이 아니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화장대 서랍 위에 나열되어 있는 향수병들을 손가락으로 골라본다. 

‘흠, 랑방은 너무 스위트 하니 패스, 오늘 같은 날은 격이 없어 보이겠지. 굳이 young 해 보일 필욘없지. 다들 팔짱 끼고 듣다가 나갈 땐 두 손 비비며 볼펜 달라고 애원하며 나가게 만들어야 되는 날이니.’

딸깍. 손가락은 조금 방황하다 넘버 5의 뚜껑에서 안착했다. 입에 칼 물고 있는 5층 미친년이라는 별명을 00 학원 원장이 붙여줬다는 얘기가 생각나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현재 입시제도에 대한 현란한 비판과 불안감을 조성하며 오늘의 세미나에서 사전 등록률 100%를 만들어야 한다. 돈 냄새를 맡았는지, 앞뒤 빌딩으로 속속들이 대형 학원 체인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년 학기 초의 기세를 잡으려면 올해의 10월에 사전 등록을 마감시켜 놔야 한다. 그래야 1차 사전등록 마감이라는 10월의 기운이 학부모들의 불안감을 자극해서 11월 12월의 2차 대기자까지 해놔야 내년 3월에 만석을 채울 수 있다.      

“띠리링, 오늘의 일정 시작 30분 전입니다. 띠링 띠링 띠링”      

아차, 학부모 세미나 일정에 신경 쓰다 보니, 3시 면접 일정을 잠시 잊었다. 지금 출발하면 5분쯤? 늦을 것 같지만 요새 면접자들은 시간 맞춰오는 사람은 잘 없으니 딱 맞을 것이다. 어차피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는 것도 일없는 원장처럼 보일 수 있으니, 10분 정도 늦게 들어가면 딱 맞겠다. 오늘의 향수에 어울리는 샤넬백을 하고, 학부모들에게 받은 목걸이를 같이 걸었다. 얼마나 잘 나가는 원장인지는 목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는 원장들의 룰이 있다. 자기 돈으로 목걸이 하는 원장만큼이나 바보 같은 원장이 없다고. 점수만 잘 내주면 금목걸이로 화답하는 게 이 바닥 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돼지엄마로 불리는 빠른 엄마들은, 패션감각과 상관없이 오늘의 학부모 세미나에 오는 학부모들은 어떤 원장은 몇 돈 짜리 목걸이를 몇 개를 걸었더라 라는 게 그 학원의 작년도 성과를 점치는 암묵적인 비법이기도 하다. 

3시 10분. 딱 예상한 도착에 학원 앞에 도착했다. 안내 데스크 앞에서 기웃기웃 대는 모습이 보여야 되는데, 안 보인다.      

‘뭐지, 아직 안온 건가?’     

차키를 안내데스크에 올려두다가 문이 열려 있는 빈 대기실이 보였다. 학원애들이 셔틀 타기 전에 대기하는 곳인데, 슬쩍 보니 빈 의자에서 노트인지 책인지를 보고 있었다. 기웃거리며 있거나, 핸드폰 질 하고 있는 모습에 익숙했었는데, 좀 새로운 면접 자다. 깔끔한 검정 정장이지만 오늘 처음 입은 것 같이 사용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정장을 보니 늘 입던 옷은 아닌가 보다. 대학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이가 조금 애매하게 보인다. 이력서는 부원장이 검토하고, 나는 면접만 보니까 이력서를 미리 보지는 않는다. 어차피 수업하는 거보면 견적 나오니까. 흥미로운 사람일세.      

“일찍 오셨어요?”     

 내가 들어온 기척을 못 느끼는 것 같아서, 강의실 문 앞에서 인사를 건네며 면접 시작을 알렸다. 이력서를 못 봤기에 경력이나 메인 교재 등을 물어보며 신변을 파악해갔다. 교육 쪽 전공을 하고 과외 경력은 있지만, 학원은 처음이라고 한다. 아이가 있어서 일을 쉬고 있다가 다시 시작한 상태라는 것을 파악했다. 면접도 처음인 것 같아서 학원가의 전반에 대한 사사로운 이야기를 이리저리 해주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보통 이 정도 이야기하면 얼마까지 벌어봤는지를 궁금해하는 게 다음 스텝인데, 교육 쪽 일을 해왔음에도 학원일이 지금이 처음이라는 걸 보니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대강 이야기 나눴으니 시강을 부탁하자, 칠판을 찾는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다. 전자칠판을 쓴 지가 몇 년인데 라는 말이 속에서 나올 뻔했지만, 가방 속에서 전지를 꺼내는 모습을 보고서는 그냥 나는 입을 다물어야겠다 싶었다. 나름대로 넓은 판을 찾아서 TV 화면에 붙이려고 낑낑대고 있는 모습을 보며, TV 위에 남을 스카치테이프 자국이 걱정되는 마음도 웃음과 함께 꾹꾹 눌렀다. 우습게 보이지는 않지만, 왜인지 모를 명랑함과 엉뚱함에 입꼬리가 올라가게 되었다. 준비한 수업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차피 이 면접이 처음일 테니 경청해주고 피드백도 디테일하게 해 줬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면접자의 명랑함이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 불편함은 뭘까. 시계에 진동이 울린다. 4시 광교지점으로 학부모 세미나 일정을 가려면 이제 마무리 짓고 나가야 된다. 면접자가 준 신선함과 불편함 사이에 혼란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정리를 하며 고등 독해 수업도 궁금하니 영상으로 보내달라고 이야기했다. 아차, 나도 모르게 기계적으로 하던 말이 내뱉어졌다. 하지만 해맑게 “알겠습니다”라고 하는 면접자의 얼굴을 보고서는 취소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면접은 종료되었다.      

 삐빅,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찾아서 운전석에 앉아서 내비게이션을 켠다. 화장을 고치려고 백미러를 거울삼아 내 얼굴을 본다. 자랑스러웠던 무거운 금목걸이가 갑자기 치렁치렁하게 느껴진다. 립스틱을 꺼내려 조수석에 샤넬백을 열어본다. 이 샤넬백을 처음 샀던 날이 생각난다. 처음 메인강사가 되었을 때, 다른 강사들에게 짜져보이지 않기 위해서 12개월 할부로 산 나의 첫 샤넬백. 학원강사들은 몸에 걸고 다니는 게 자신의 연봉이자 성과이기에 잘 꾸미고 다니라고 얘기해준 스타강사가 된 선배의 말에 큰맘 먹고 질렀었다. 카푸어(car poor)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백 푸어(bag poor)가 되었다. 아무렇지 않게 들고 다녔지만, 매달마다 샤넬백 할부금을 갚으면서 다음 달에 못 내면 어떻게 하지, 강의가 끊기면 어떻게 하지 불안해하며 손톱을 깨물던 그 시절의 불안한 내가 생각났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시동을 끄고 차 안은 고요해지면 머릿속은 시끄러워졌다. 아까의 불편함은 뭐였을까. 샤넬백을 집으려다 말았다. 백미러로 다시 거울의 나를 본다. 목에 걸린 치렁한 목걸이들을 빼서 샤넬백 안으로 집어넣었다. 나를 맴돌던 불편함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이 바닥에 들어왔을 때의 모습이 아까의 면접자에 오버랩되었다. 교육의 판도를 바꾸겠다고, 사교육 시장의 부조리를 역이용해서 아이들에게 선의의 기회를 주겠다고 외치던 나의 명랑했던 10년 전이 생각났다. 하다 보니 현실이 그게 아니더라는 핑계나 먹고살아야 되니 일단 했지 라는 변명으로는 이 불쾌함을 떨칠 수 없다.     

 거울 속에 나를 보며 화장을 고치고, 차문을 닫았다. 샤넬백은 챙기지 않았다. 내 목에 족쇄 같았던 목걸이도 없다. 나는 나를 믿던 사람이었다. 오늘은 다시 10년 전의 나로 시작해보자.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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