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은 처음이라(11)
'엄마, 이따가 만나~'
'응! 재밌게 놀다 와!'
아이의 어린이집 등원 미션을 끝낸 뒤, 주차된 차로 돌아오는 순간이 이제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삐빅'
등원 미션을 마친 뒤의 주차된 차 문을 여는 순간만큼은 나 자신의 나르시시즘에 빠진다. 마치 신도시에 살고 있는 내가 꿈꾸던 30대의 멋진 엄마의 모습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운전을 시작하고 나서 느끼는 나만의 작은 성공의 만족감이랄까. 운전을 시작하고 그런 소소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주차된 차 문을 열고 들어오면 느껴지는 조용한 정적. 금방까지 타요, 핑크퐁, 슈퍼 심플 송 갖가지의 노래들이 흘러나오는 소란스러운 시간들이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낯설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5분 거리라도 내비게이션을 켜서 왔던 긴장감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다. 적막이 어색해서 다시 음악을 틀어본다.
'아기 상어 뚜루루루~'
아까 아이와 같이 듣다가 끝난 음악이 다시 재생되었다. 풉 하고 혼자 웃으면서 음악을 껐다. 그러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은 지가 얼마나 되었을까? 조리원에서도 걸그룹 아이들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다이어트를 결심하고 할 정도로, k-pop에 진심이었던 나이다. 그런데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들어야지 하는데 어떤 노래를 검색해야 될지 잠시 손가락이 갈피를 잃었다. 노래 제목도, 어떤 노래도 떠오르지 않는 상태지만 이제 음악을 들으면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싱그러운 아침에 듣기 좋은 라운지 음악 플레이리스트'
라는 유튜브 알고리즘에 따라 클릭해본다. 알아들을 수 없는 팝이고 처음 듣는 음악이지만 마치 나의 자유로운 기분의 BGM이 되는 것 같은 트렌디함이 느껴진다. 주차장에서 선곡을 마치고 출발을 해본다. 늘 긴장하며 멈췄던 빨간불도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같다. 이제 운전의 다음 단계인 드라이브를 즐기는 단계로 이렇게 넘어가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전을 하는 친구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이 바로 '스트레스받을 때는 드라이브를 해'라는 말이었다. 어떻게 드라이브가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되는 것일까? 내가 달리고 싶은 속도대로 달리다가도 앞차가 보이면 차간 간격을 유지해야 되고, 또 운전을 하면서 옆의 풍경을 제대로 볼 수 도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드라이브'라는 개념은 초보운전인 나에게 마치 화성에 땅을 살 수 있는 권리가 생겼다는 말처럼 있을 수는 있지만 나에게는 일어날 일이 없는 것 같은 것이었다.
회사에 다닐 때 아주 악질이 높은 차장님이 계셨다. 회사 사람 모두가 이 사람 앞에서는 벌벌 떨 수밖에 없는 '마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일에 있어서는 얼음장처럼 차갑고 원리원칙을 고수하다 보니, 그 어떤 사람이 앞에 가더라도 그 차장님이 메신저로 말을 걸어오면 그때부터 머리가 하얗게 된다고 해서 '하얀 마녀'라는 별명이 있기도 했다. 소문으로만 익히 알고 있었고, 나랑 만날 일이 있지는 않았던 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워크숍에서 술판을 피해 구석진 베란다 자리 쪽으로 갔는데, 그 하얀 마녀 차장님을 맞닥뜨리게 된 적이 있었다. 구석진 곳이어서 서로 마주쳐서 보이다 보니 보고 피할 수도 없어서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차장님도 그 자리에서 캔맥주를 혼자서 마시고 계셨다. 스탭이라 술을 마실수 없는 나는 애꿎은 캔커피만 만지작거리면서 옆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따서 마셨다.
"이대리는 어떤 커피를 제일 좋아해요?"
"네? 아 저는 믹스커피 좋아해요. 아메리카노는 사실 맛을 잘 모르겠어요."
"그래? 내가 믹스커피 진짜 기가 막히게 맛있는 곳을 잘 아는데."
"아.. 차장님도 믹스커피 좋아하세요? 어느 커피숍이에요?"
"우리 집에서 한참 달리다 보면 미사리 조정 경기장 쪽에 자판기가 하나 있어요. 그 자판기가 딱 하나만 있거든. 동전을 넣어야 나오는 건데 500원인데 그 자판기에 믹스커피가 나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내가 집이 마포인데, 하루는 그냥 달리고 싶은 날이 있었어. 그렇게 쭉 달리다가 어느 순간 미사리까지 온 거야. 너무 깜깜하고 아무것도 없어서 이제는 그냥 이대로 멈추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깜깜한 곳에서 자판기 빨간 불만 작게 깜빡이는 곳이 있었지 뭐야. 그래서 불빛을 보고 멈췄는데 자판기가 있는 거야. 거기에 자판기에서 믹스커피 뽑아서 보면 어두워도 미사리 강가가 탁 트여서 아주 강바람이 차. 그런 찬 바람 속에 따뜻한 믹스커피를 마시다 보면, 조금은 답답한 마음이 없어지더라고."
술기운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분인데 소문만 무성했는지 모르겠지만, 차장님의 믹스커피 이야기를 듣다 보니 조금은 그분도 사정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드라이브로 스트레스를 푸는 차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드라이브는 뭔가 어른의 성숙한 일탈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는 운전의 다음 레벨인 드라이브의 단계가 BGM덕인지, 아니면 조금은 익숙해진 길 때문인지 오늘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옆의 풍경을 보고 있지는 않지만 무언가 익숙한 상태에서 움직이면서도 조용한 나만의 시간. 오늘 장 볼거리를 생각하다가, 냉장고에 남은 재료가 양배추가 남아있었지라는 생각에 양배추찜을 먹었던 중학교 2학년 때의 내 모습까지. 그리고 그때 같이 놀던 친구들의 이름이 생각난다. 잠시 멈춘 빨간불에는 친구들에게 오랜만에 연락해볼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 친구는 뭐 하고 있었지, 출산일이 이제 곧 다가오는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벌써 출산한 건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추억과 기억 그리고 할 일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꼬리물기의 상상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마치 사진 정리를 하려고 사진첩을 열었지만 정작 사진 구경을 하느라 사진 정리의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는 것 같은 추억여행을 한 기분과 비슷해지기도 하다. 드라이브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기분은 이런 기분인 걸까. 머물고 싶은 기억을 달리는 것과 같은 기분. 또 한편으로는 도망치고 싶은 기억에서 빠져나오는 것과 같은 기분이기도 하겠지. 그런 기분이 드라이브라면 이제 내가 익숙한 길의 잠깐의 5분이지만 이 5분을 드라이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그 하얀 마녀 차장님도 머물고 싶은 기억과 도망치고 싶은 기억의 사이에서 달리다가 그 자판기의 불빛을 만나게 되었던 게 아닐까. 이제는 그때의 하얀 마녀 차장님의 나이가 된 나를 보면서 드라이브를 즐겨보려 한다.
연기에서 인생을 배운다는 어느 연기자의 수상소감처럼, 운전을 시작하면서 인생을 배우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