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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향 Jul 13. 2021

빠르게 흘러가는 것들

[글모사9기]추억-느리게 재생

                  

추억은 저장되고 있는 것일까


많이 잊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억 속에 저장되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저장되고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휴대폰에 들어있는 사진이 온통 아이로 가득한 날들이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얼굴이 예뻐서, 콧물이 방울방울 풍선을 만드는 것도 모른 채 울고 있는 얼굴이 귀여워서, 아장아장 기어 다니는 모습이 신비로워서, 옹알옹알 두 입을 쫑긋 모으며 말하는 입을 깨물어 주고 싶어서 휴대폰 카메라로 담아내곤 했다.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이 너무 소중해서 잠깐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순간에 머물곤 했었다.


아이에게 세상을 보여주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시골마을 담장 가득 핀 이름 모를 예쁜 꽃을 바라보며, 바닷가 모래사장에 가득 담긴 반짝이는 조개를 찾으며, 주차된 자동차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 가족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이와 함께 발걸음을 멈추고 그 순간에 머물곤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이후부터는 세상을 볼 일이 적어졌다. 바쁘다는 핑계로, 코로나라는 질병을 이유로, 계절의 변화에도 무심해졌다. 나의 휴대폰 앨범은 더 이상 아이 사진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잠들기 전 무심코 사진을 훑어보다가 아이와 최근에 찍은 사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추억을 쌓기도 전에 지나치기 바빴다


어떻게 그동안 아이와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는 것인지. 

그렇게 생각하며 바빴던 하루를 탓했다. 우리 세상을 바꿔놓은 코로나를 원망했다. 늘 그 모습 그대로인 아이와 충분히 행복한데 굳이 사진으로 담아낼 필요는 없었다는 핑계도 동원한다. 하지만 아이의 모습으로 시선이 향할 때면 매서운 눈빛으로 숙제를 검사하고,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도록 학업을 점검하며, 학원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기 바빴다. 매일 보는 아이의 모습은 영상을 빨리 감듯 제대로 보지도 않고 휙휙 지나쳤다. 


하원 시간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로 북적거리는 학교, 신호등 앞으로 수많은 발걸음이 오간다. 마스크를 쓴 아이들이 종알종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목적지를 향하는 걸음들이 가득하다. 어느 건물 1층에 새로 생긴 서점, 다른 가게가 입점하지 않아 여전히 비어있는 건물, 편의점 앞으로 삼삼오오 줄을 지어 들어가는 행렬, 이국적인 향신료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돈가스집, 하늘 위로 구름이 몽글몽글 피어난 것도 모른 채, 집에 두고 간 학원 숙제를 아이에게 전달하기 바빴다. 조금만 고개를 들어도 눈에 들어올 풍경을 아주 자연스럽게 무시하고 있었다. 누군가 내게 변화하는 풍경을 이야기해주지 않는 이상, 아마 꽤 오랜 시간 동안 지나쳐온 거리의 새로움을 혹은 여전함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천천히 느리게 재생


어느 저녁이었다. 일을 마치고 피곤에 절은 몸이지만, 모락모락 저녁밥을 짓고 식탁에 앉아 밥을 한술 떠 넘기려던 때였다. 아빠와 대화를 나누던 아이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브레이브걸스의 역주행 곡 롤린(Rollin)을 흥얼거리며 몸을 꿀렁꿀렁 움직이는 것이다. 밥을 먹다 말고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인가 앉으라고 했지만, 아이의 엉뚱한 춤사위가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여 휴대폰을 가져와 촬영을 하겠다고 붙어 선다. 순간 행복이 와락 몰려들면서 이 장면이 느리게 흘러가기를 바랐다. 


그동안 쉬이 지나쳤던 찰나의 순간을 눈에 담으면서 다시 아이와 함께하는 사소한 일상을 사진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장난하는 모습을, 아파트 광장에서 조명 사이를 오가며 뛰어다니는 모습을, 칼국수 면발을 후루룩 말아 올리며 감탄사를 내뱉는 모습을, 공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아빠와 캐치볼을 하는 모습을, 친구들과 땀을 뻘뻘 흘리며 피구를 하는 모습을... 굳이 찾아보려 하지 않았을 뿐 아이의 소중한 모습들은 늘 내 곁에 있었다. 줄곧 간직하고 싶었던 순간은 내가 고개를 들어 간직하고, 기억하고, 담아 내려할 때 선명해졌다. 너무도 당연해서 등한시했던 것에 주의를 기울이기도 한다. 빠르게 지나쳤던 일상을 되감을 순 없으나 다시 한번 느리게 재생해본다. 




일상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담겨있는 우리들의 영화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언제나 빠르게 흘러가버리지만

발걸음을 멈추고 그 순간에 머무르듯 

어떤 화면에서는 일시 정지해가며

때로는 아주 느리게 재생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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