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즐거움을 느끼고 싶을 때

빛보다 빠르게 생각 줍기

by 김글향


꽂힌다는 말에 꽂혔다


어느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릴없이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모니터 속 글귀 중에 <요즘, 어떤 것에 꽂혀있나요?>라는 문장이 두 눈에 들어왔다. ‘글쎄… 나는 어떤 것이 꽂혀있지?’ 찬찬히 머리를 굴리다가 느닷없이 꽂힌다는 글자에 꽂혀버렸다. 가만히 눈을 감고 내가 꽂힌 것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짬짬이 읽다가 말기를 반복한 소설책, 눈앞에 아른거리는 TV 홈쇼핑 카디건, 요리 유튜브 영상, 신나고 잘난 사람은 죄다 모아놓은 듯한 인스타그램. 시선을 드리우면 자극적인 재미는 넘쳐난다. 다만 이 꽂힘은 내가 갈망하는 욕망과는 그 질감이 다를 뿐이었다. 무언가에 홀리듯 붙들려 있으면 나는 단단히 고정된 게 아니라 반대로 길을 잃고 헤매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하고는 있으나 무엇이 되기 위한 노력인지를 알 수 없는 행위들... 그 무의미함을 인지하는 순간 불안감이 몰려든다. 홀리지 않는 세상에 나를 단단히 고정하고 싶다. 그 어떤 상념도 개입할 수 없는 의식의 공간에서 오직 강한 이끌림 하나만으로 빨려 들어가는 꽂힘! 그런 몰입의 순간 말이다. 생각하기보다, 생각하는 것 자체를 잊고 마는 결정의 순간. 그곳으로 곧장 뛰어들고 싶었다.



몰입의 순간에 피어나는 창의성


몰입이란 주위의 모든 잡념, 방해물을 차단하고 원하는 한 곳에 자신의 모든 정신을 쏟아내는 일을 말한다. 깊이 몰입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몰두한 것이 아니다. 몰입한 순간에는 자신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몰입의 순간은 경계 없는 무중력의 상태, 무엇이든 규칙 없이 들고나갈 수 있는 상태, 인식의 빗장을 완전히 열어놓은 상태이다. 나는 몰입의 시간을 좋아한다. 극도의 몰입에 다다르면, 개념과 개념이 서로 스미듯 흡수되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세상이 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새로운 하나의 언어를 창조해내는 것. 이것을 우리는 은유라고 하는데, 은유가 곧 창의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순수한 몰입의 순간에는 인식과 인식의 충돌로 인해 모든 창의성이 피어나는 것이다.



멈춰있어도 움직이는 수집 본능


아주 오랜만에 오래된 노트를 열어보았다. 노트에는 <영감 기록장>이라는 이름도 떡 하니 붙어 있다. 책에서 얻은 영감, 수업에서 얻은 영감, 일상에서 얻은 영감, 대화에서 얻은 영감! 공기 중에 동동 떠다니는 영감들을 날려버리지 않고 꼼꼼히 기록해두었던 노트였다. 어릴 적에도 메모에 꽤 진심이었던 나는 흩어지는 영감들을 수집하는 노트를 만들어두었고,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 열어서 긁적이곤 한다. 노트에는 오래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다.


몰입은 은유로 들어서는 문이다. 은유란 무질서 속에서 찾은 새로운 질서다. 주위에 맴도는 수많은 단어를 수집하는 아이의 특별한 세상 <<단어수집가>> 제롬은 세상 많은 것 중에서도 낱말을 모으는 단어수집가였다. 자기만의 체계적인 언어 세계에 빠져 사는 아이다. 수집한 단어가 점점 많아지자 주제별로 차곡차곡 낱말 책에 정리도 해본다. 그러던 어느 날 차곡차곡 쌓아 올린 단어의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사건을 겪는다. 위태롭게 쌓인 낱말 책을 옮기려다가 책들이 와르르 무너지고, 애써 분류한 것들이 뒤죽박죽 섞여버리고 만다. 제롬의 세계는 일시적으로 붕괴된 듯했으나 이내 흐트러진 단어들은 새로운 조합을 찾고 전에 없던 의미를 가진 단어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몰입의 세계에서 은유를 통해 제롬의 세계가 확장되는 순간이다.


“이야기를 듣다가 왠지 관심이 가는 단어. 지나가다가 눈길을 끄는 단어. 책을 읽다가 문장 속에서 툭 튀어나오는 단어. 기분이 좋아지는 말. 소중한 단어. 저절로 그림이 그려지는 단어도 있어. 제롬은 낱말들을 모두 줄에 매달았어. 나란히 있으리라 상상도 안 해 본 단어들. 제롬은 그 단어들로 시를 썼어. 그 시로 노래를 만들었지. 모두가 감동했어.”


코뿔소 옆에 밀라노, 파랑 옆에 초콜릿, 슬픔 옆에 꿈. 나란히 있으리라 상상도 해보지 못한 단어들이 짝을 지었고, 그것을 본 제롬은 마침내 깨닫는다.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의 조합으로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제롬은 그 단어들로 시를 썼다. 시로 노래를 만들었고 모두가 감동한다. 나만의 단어를 찾아서 네가 누구인지 세상에 외치는 것. 마침내 나의 특별한 세상이 열린다.


“더 많은 낱말을 알게 될수록 여러 생각과 느낌과 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어.”


우리들의 일상에는 나를 골치 아프게 만드는 말도 많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미 있는 말들도 참 많이 숨어있다. 오늘 하루! 등잔 밑에 숨어있는 단어들을 쏙쏙 찾아내며 내 마음에 시를 처방해보는 것은 어떨까? 단, 주의사항이 있다. 생각은 찰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어서, 떠오르는 순간 빛보다 빠르게 주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억 속 저편으로 까마득히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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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책 정보 <단어수집가>
✍️ 피터 레이놀즈 글. 그림 / 문학동네
이어지고, 바뀌고, 새로운 힘이 생긴다! 우리 주위를 둘러싼 단어의 마법. 제롬은 '단어'를 모으는 단어수집가이다. 어떤 단어들을 모으는 걸까? 모은 단어로 무엇을 할까? 왜 모을까? 제롬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빛나는 비밀이 들어 있다.

✅함께 보면 좋은 그림책 <나는 시를 써>
✍️ 질 티보 글. 마농 고티에 그림 / 한울림 어린이
시란 무엇인지, 아이들의 생각을 모아서 한 편의 그림책에 담았다. "시를 쓴다는 건 빛의 노트의 가장자리에 슬그머니 침묵을 모으고 부드럽게 잠을 모으는 거야." 우리가 살고 있는 주위의 사물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 보면, 시는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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