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아, 가볍게 날아올라
5월의 끝자락, 스멀스멀 시작되는 무더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잠깐 여행을 떠나는 상상을 해본다. 하지만 책상 가득 어지럽게 펼쳐진 서류 더미와 달력에 빼곡히 적혀있는 스케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신 휴대폰 속 사진첩을 들여다본다. 태국 여행을 떠났던 순간으로 들어갔다.
태국 여행은 바쁜 아빠들을 제외하고, 엄마와 아이들만 떠나는 여행이었다. 학부모로 만난 이웃 언니와 그 아이들, 우리 아이와 함께 떠났던 여행. 남편 없이 아이를 데리고 해외까지 가는 것이 내심 불안했던 나는, 여행 전부터 철저히 계획을 세웠다. 여행사를 선정하는 것만도 꼬박 이주는 고민했던 것 같다. 어디 그뿐인가. 짐은 또 얼마나 한가득 꾸렸는지. 날짜별로 입을 옷, 비상식량, 비상 약품, 심지어 책 두 권에 헤어용품까지... 짐을 쌀 때 정신이 살짝 가출했던 것이 틀림없었던 것 같다. 지퍼를 잠그려면 가방 위에 올라타야 할 정도로 빵빵하게 짐을 꾸렸고, 그 짐은 여행 내내 말 그대로 짐 덩어리였다. 태국 땅을 밟자마자 열정 엄마들이 선택한 패키지를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녔던 아이들. 무거운 짐까지 가세하여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갔다. 뜨거운 햇볕 아래 이국적인 풍경이 물씬 느껴지는 사원에서 사진을 찍는 순간이었다. 연신 찍어대는 엄마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 웃어주는 착한 아이들. 그 모습을 보며 추억을 위해 사진을 찍는 건지, 사진을 위해 추억을 찍는 건지 모를 혼돈을 느꼈다. 이후 언니와 나는 가이드님께 양해를 구하고, 빼곡한 일정 하나를 정리했다. 숙소 이동 후 또 다른 관광이 있었지만 우리는 쿨하게 포기했고, 숙소에서 시간을 낭비하기로 한 것이다.
딱 좋은 온도의 수영장에 몸을 담그고, 온종일 물 안에서 신나게 뛰어놀던 아이들. 비치 의자에 앉아 지금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수다 삼매경에 빠진 엄마들. 비로소 여행의 묘미가 느껴졌다. 그때 알았다. 모든 여행에는 시간을 낭비할 권리도 포함되어있다는 사실을!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날, 아빠는 아이에게 뭐가 제일 재밌었는지 물었다. 아이의 대답은 역시나 코끼리 체험, 악어 쇼, 사원, 박물관 등 각종 문화탐방 따위를 들먹일 리가 만무했다. “수영장에서 물놀이한 게 제일 좋았어!”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체험을 해맑게 떠올리던 아이를 보며 피식 웃음이 났다. 그 후로도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시간을 낭비한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순간만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사실은 나도 그랬다. 여행 내내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짐과 빡빡한 일정으로 채웠던 불필요한 욕구들로 인해 주어진 시간이 힐링타임인지 킬링타임인지 모를 정도로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던 순간들을 뒤로하고, 오직 생생하게 느껴지는 한 장면. 나로 가득 채울 수 있었던 순간의 추억만이 가슴 깊이 남아있었다. 여행에서 그 순간을 즐기는 힘은 절대 계획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마음 편히 여행을 떠난 것이 언제였을까. 원하는 곳으로 훌쩍 떠날 수 없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난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그 순간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림책 <<여행의 시간>> 은 베네치아 산마르코 성당, 로마 바티칸 미술관, 바하리야 오아시스 등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여행지에서 보낸 시간을 담았다. 작가는 이렇듯 유명한 공간들도 좋지만 낯선 여행지에서 오직 나만이 발견할 수 있었던 순간들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여행지에서 느낀 벅찬 감동은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바하리야 오아시스에 갔을 때야
사람들은 흰 사막과 검은 사막을 보라고 했어.
낙타도 타 보라고 했지.
하지만 나는 밤하늘을 가득 수놓는 별들을 만났어.
살아서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도 들었지.
그리고 차츰 밝아 오는 새벽을 맞았어.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걸로 충분했어.”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얼마나 멋진 순간을 보내게 될지 설레기도 하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사람들이 추천하는 유명한 여행지도 좋지만, 오직 나만이 발견하는 순간도 있다. 나를 가득 채우던 순간들... 여행을 다녀온 후에는 여행의 시간을 아쉬워하며 다음에 떠날 여행을 기대하게 된다.
“바쁘거나 힘이 들면 나는 그 벤치를 생각해.
바람 한 자락을 떠올리며 싱긋 웃지.
그러면 내 가슴은 삶에 대한 사랑으로 차올라.
다시 두근거려.”
여행에서 보낸 시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일상에서 다시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지극히 평범하게 느껴지는 순간일지라도, 너무 사소해서 남들 눈에는 별것 아니게 보이는 순간일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줄 수 있는 것임을 느끼게 된다. 지나간 여행의 시간을 떠올리며, 다시 바쁜 일상을 살아갈 에너지를 뿜어내는 것. 이것이 우리가 여행을 떠나려는 이유는 아닐까?
✅ 그림책 정보 <여행의 시간>
✍️ 소연정 글. 그림 / 모래알
여행은 우리를 설레게 한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하게 된다. 사람들이 추천하는 여행지도 좋지만 유명한 관광지들도 훌륭하고 멋지지만 여행을 통해 오직 나만이 발견하는 순간도 있다. 나를 가득 채우던 순간들. 당신은 어떤 여행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나?
✅ 함께 보면 좋은 그림책 <파도는 나에게>
✍️ 하수정 글. 그림 / 웅진주니어
바다는 땅과 하늘 사이, 밀물과 썰물 사이 파도가 그리는 곡선을 따라가며 사유와 여행이 이루어지는 친숙 하면서도 낯선 공간이다. 그 놀라운 풍경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 자신과 만난다. 파도 한 장, 한 장을 넘기면서 잊고 지낸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 보라고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