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사랑일까 Take this waltz>
난봉에 대한 동경이 있다. 거절이나 단호함이 줄 상처 때문에 자유롭게 살지 못하므로. “그딴 거 신경 안 써. 난 나의 행복이 최우선 순위야”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항상 부럽다. 난 그런 선택을 못한다. 마음대로 해버리고 나서도, 기껏 질러놓고 나서도 남 눈치 보고, 후회하는 성정이므로. 항상 내 마음은 2순위였다.
스물여덟에는 난봉꾼이 인생의 목표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썅년이 돼보고 싶다는 목표를 세운 적도 있었지만, 실천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못했나. 넌 평생 난봉꾼은 될 수 없으리라 호언장담하는 친구들을 보면 사람은 참 안 변한단 말이 맞는 것 같기도. 그래서 결국 하는 일이라고는 용기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열심히 감동받고 감탄하는 일이다. 난봉에 대한 경외랄까. 하고 싶으나 할 수 없어. 난봉 넌 너무나 먼 것. -하지만 열심히 Tu es beau(당신 잘생겼어요) 같은 말들을 외우고 다닌다. 인생은 모르는 일이니까-
워너비 난봉, 워너비 썅년. 난봉꾼과 썅년을 동경한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줄 것이 뻔함에도 자신의 행복을 1순위로 놓을 수 있는 용기가 부러웠기 때문이다. ‘행복해질 용기’ 그들은 그걸 가졌다. 사람들은 당연히 본인 스스로가 행복할 선택을 하며 살고 있다 생각하지만, 실은 그 당연한 일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많진 않다. 더 소중한 것이(라 믿고 싶은 것이) 생겨서, 정돈된 생활을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아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등등의 이유로 결국 우선순위에는 나의 행복과 관련 없는 엉뚱한 것들이 놓이게 된다.
그리고 세상은 그런 것이 인생이라 이야기한다. 인내하지 못하는 건 어린아이 같이 철없는 행동이고, 미성숙하며 비겁한 일이라고. 잘 참아내고 견뎌내는 것이 성숙한 어른이 되는 길이라고.
<우리도 사랑일까 Take this waltz>의 마고 역시 어린아이와 어른의 갈림길 앞에 서게 된다. 5년 동안 결혼생활을 이어온 남편 ‘루’와 새로 이사 온 옆집 남자 ‘대니얼’ 사이에서 누구와 남은 생을 함께 할 것인지 답을 내려야 한다.
어떤 선택이든, 이미 마고의 삶은 덫에 빠졌다. 남편 ‘루’를 버리면 매일 그와 벌이던 과격한 언어유희를 더 즐길 수 없게 될 것이고, 사랑스러운 조카 토니가 자라나는 모습도 더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을 선택하면 대니얼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 것이다. 이미 알아버린 결핍을 모른 척 애써 덮어두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연기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철부지가 되려면 돌아올 비난의 손가락질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마고는 100% 행복은 없는 이 선택지 속에서 하나를 선택한다. 철없는 어린아이가 되기로.
이제 영화는 마고가 감당해야 할 손가락질, 그리고 권태의 반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새 것도 헌 것이 된다”는 수영장 할머니들의 대사. “모든 사람들이 미친 것처럼 빈 구멍을 메우며 살지는 않아”라는 시누이의 대사. 모두 마고가 감당해야 할 손가락질이다. 동시에 우리는 루와 하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양치하며 대니얼 앞에서 소변을 보고, TV 뉴스를 보며 무심하게 밥을 먹는 마고를 만나게 된다. 다시 모든 설렘이 일상으로 변해가는 장면을 목격한다. 대니얼도 루와 다르지 않음을 마고는 하루하루 지독하게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 잔인하다. Video killed the radio star를 틀어줄 때부터 감독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같은 해피엔딩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이 잔인한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선을 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마고가 나 같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마고의 안간힘이 나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마음이 다 간 대니엘에게 30년 뒤에 만나자고 하거나, 결국 침대에서 다시 일어나 남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갔던 장면, 남편에게 말하기 전까지는 그 어떤 선도 넘지 않은 마고의 모습.
그러니까 쉽지가 않다. 프로난봉꾼과 썅년이 되는 길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자신의 행복을 1순위로 생각하기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다. 어떤 선택을 하는지가 그 사람을 보여준다는 말도 맞지만, 그 선택만으로 한 사람을 평가하는 일도 굉장히 폭력적일 수 있다. 누군가는 나와 달리 그런 선택이 쉬워서 하는 것이 아님을. 내가 쉽지 않았던 것처럼, 분명 상대도 쉽지 않았음을 아주 열심히 보여준다.
루와의 그저 그런 결혼기념일, 질려가는 닭요리와 변할 것이 없는 일상. 같은 음악을 들을 수 없는 부엌과 정원 사이의 창문. 대니얼에게 들켜버린 자신의 본모습. 겉돌기만 하는 대니얼과의 수영장씬. 장면 하나하나가 마고의 안간힘을 보여준다.
결괏값만 보자면 마고는 난봉꾼이지만, 과정 속에서의 마고는 나와 다를 것이 없었다. 아주 많은 부분, 용기를 내지 못하고 살아가던 한 사람이 무언가를 감수하고 ‘선택’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을 내리기까지 안간힘은 나의 발버둥과 모양새가 다르지 않다. 마고는 나와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일까.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을 주는 영화는 언제나 사랑스럽다.
동시에 사랑스러운 건 마고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다. 감독은 ‘미친년처럼 구멍을 메워봤더니 어때? 별거 없지? 라며 마고의 어리석음을 비웃지 않는다. 내게 이 영화는 ‘거 봐 네 선택이 틀렸지’를 보여주기 위한 영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애초에 꿈꾸는 건 어디에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 그 선택을 묻는 영화였다. 처음부터 마고는 대니얼과의 사랑이 완벽하거나 더 진정성 있는 영원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얻은 사랑이 될테니까. 선택의 순간부터 양쪽 다 100%가 될 수 없음을, 그 불온전함을 알고 있었기에.
때문에 감독에게 마고의 선택이 안정인지 모험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영화는 그저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둘 다 불행(행복)하긴 할 테지만, 어떤 모습의 불행(행복) 일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게 당신의 인생이죠. 어떤 선택이든, 당신이 고를 문제죠.'라고.
감독은 마고에게 선택권을 주었고, 마고는 선택했고, 아파했고, 결국 놀이기구에 혼자 올라탄다. 자신의 두 다리로는 공항에서 환승도 하지 못하던 마고가 대니얼을 향해 두 다리로 달려가는 장면은 끈질기게 마고에게 선택을 맡기는 감독의 인내를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마고는 혼자 배를 타고 섬으로 간다. 혼자 놀이기구에 오른다.
휘둘림. 머뭇거림. 선택. 휘둘림. 머뭇거림. 선택.
산다는 건 완벽하지 않은 선택을 휘청거리며 해나가는 일이라는 것. 그 자체를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마침내 그 연쇄를 깨달은 마고는 혼자 올라탄 놀이기구에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응, 가봤더니 별 거 없더라. 그런데 그래도 괜찮았어. 원하는 건 없었지만.’ 영화의 원제 Take this waltz (지금 이 왈츠를 춰요)는 지금 더 반짝이는 것을 고르라는 말이 아니라 불온한 선택지들 중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마고는 그 일을 훌륭히 치러냈다. 워너비 난봉에게 이보다 더 사랑스러운 영화가 있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