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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블 Jun 29. 2020

노래도 못하고 그림도 못그리지만 12

읽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써 드립니다. 


"살아가는데 가장 힘이 되는 것들에 대해서요."


    

가장 힘이 되는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다.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공들여 내린 드립커피를 마시기 위해서 오늘 얼음트레이에 물을 채워 냉동실에 넣어놓고 자는 일. 맛있는 원두가 떨어지지 않도록, 발품을 팔아 원두를 사고 분쇄해서 집에 채워놓는 일. 그런 일들이 살아가는데 가장 힘이 된다. 제철인 오이를 무쳐먹기 위해, 식초가 얼마나 남았는지 양파는 부족하지 않은지 신경쓰는 일. 유통기한은 지났지만 아직 진공포장을 뜯지 않은 두부를 버리지 않기 위해 어떤 재료를 구매해야 할지 생각하는 일.      




요즘은 거창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극본 당선이 되겠다는 목표라든가, 하루에 몇 백 페이지씩의 책을 읽겠다든가. 그런 일들은 도무지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다만 오늘 입은 옷을 언제 세탁할지 생각한다. 어제 입고 나갔던 옷을 한 번 더 입을지, 그냥 빨래통에 넣을지에 대해 고민한다. 화장실 휴지를 새로 사야 할 때는 아닌지 챙긴다. 부끄럽지만 나는 요즘 그런 일들만 골몰하고 있다. 내 한몸 먹이고 내 한몸 씻기고 내 한몸 재우는 일.      




그런 일들은 가볍다. 넣을까 말까. 한 번 더 입을까 말까. 둘 중에 하나만 고르면 된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옷을 벗고 빨래통에 입었던 옷을 집어넣는다. 이 옷을 한 번 더 입었다가 큰일이 날지를, 오늘 양파를 깜빡했다고 누가 날 손가락질 할까 겁먹지 않아도 된다. 어떤 성과를 내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고, 오로지 나의 사적인 영역이라 누가 판단하지도 않는다. 그런 별 생각 없이 해도 되는 일들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내 이름을 걸고 하는 일, 함부로 선택하면 안 될 것 같은 일. 빨리 결과를 내야 하는 일들은 조급함과 압박감을 준다. 요즘의 나는 그런 일들로는 움직이지 못한다. 그런 일들은 오히려 나를 제자리에 고여 있게 한다. 이십대 후반부터 그런 일들에만 매달려있었던 것 같다. 내 능력을 증명해야 하고, 성과가 눈으로 확인되는 일들. 몇 번을 뛰어 넘으려 애써도 결국 문턱에서 번번이 막히다 보니 나는 그런 일을 해낼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면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고, 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는다.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버린다. 그대로 번데기가 되어 실을 토하고 고치를 만든다.      




고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유일한 한가지가 ‘끼니’였다. 배가 고파지면 그제서야 일어나 몸을 움직인다. 부엌에 요기할 만한 것이 없으면 나는 다시 누워버린다. 다시 고치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다시 눕지 않으려면 부엌에 먹을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어제의 피곤했던 내가 원망스럽다. 그리고 지금은 당장 움직일 힘이 없다. 씩씩하게 세수하고 옷입고 나가 무언가 사먹을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다시 누워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먹을 것을 부엌에 준비해놓는 일이 진짜 가장 중요했다. 먹을 것이 있어야 일어나 우물우물 무엇이라도 씹고, 씻고, 움직였으니까.     




근로계약서를 쓴 사람이라면, 아마 그 한가지가 ‘끼니’가 아니고 ‘출근’이 될 수도 있겠다. 일단 나가야 하는 이유. 일단 몸을 일으키고 하루를 시작하게 하는 힘. 이유를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해야 하는 일. 나는 그런 일들을 비용과 에너지를 들여 계속해서 만들어야 한다. 등록비가 부담이 되는 필라테스를 굳이 오전반에 등록하는 일 같이. 어쩌면 필라테스는 내게 끼니2다. 주저앉아 멈춰 있지 않을 수 있게, 고치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니까. 일단 레깅스와 토삭스를 신고 문밖으로 나가게 해주니까. 지난 몇 년간 나는 무조건반사처럼 고민없이 ‘그냥’ 할 수 있는 일들을 만드려고 안간힘을 썼다. 일단 움직이게 하는 장치들을,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을 내 삶에 심어놓는 데에 온 힘을 다 쓴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아침에는 눈물이 나기도 했다. 그날 아침은 먹다 남은 식빵과 커피 한잔이었다. 허기에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이틀 전 지하철 역 앞 빵집에서 사왔던 연유식빵이 냉동실에 있었다. 허기를 지우려 일어나 빵을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고개를 돌리니 일주일 전쯤 동진시장까지 걸어가 사왔던 커피리브레 배드 블러드 원두가 있었다. 싱크대를 보았다. 커피를 내릴 드리퍼와 서버가 깨끗하게 설거지 되어있었다. 보름 전쯤 필터를 갈아놓은 브리타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포트에 담아 끓이고, 커피를 내려 얼음컵에 담았다. 빵과 커피를 담아 모니터 앞으로 이동했다. 아침을 먹으며 지난 주말에 보지 못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았다. 막힘없었고 태연했다. 어딘가에서 막혀서 다시 고치로 돌아갈 생각을 할 꺼리가 없었다는 것이, 아침을 챙겨먹고 하루를 시작한다는 일이 새삼스러웠다. 꼭 그만큼 내가 우울에서 빠져나온 건 같아 울컥했다. 빵 부스러기가 떨어진 빈 접시 위로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입안에 남은 커피의 텁텁함 위로 섬유유연제 냄새가 풍겼다.            




일상을 막힘없이 흘러가게 하는 일이 지금 나의 삶이다. 살아가기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이 자질구레하고 귀찮은 일들이 오히려 내가 살아가도록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끼니를 챙기는 일. 그런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 대본구상도, 에세이 작문도 같은 태도로 대한다. 막힘없이 흘러가지는 대로. 물론 글은 끼니와 달라서 턱턱 막혀서 곧잘 다시 고치 안으로 기어들어가곤 하지만, 그럼에도 일단 잠에서 깨면 끼니를 챙기고, 잘 개켜놓은 옷을 입고 나와 써지는 만큼만이라도, 일단 막힐 때까지는 움직여보려고 한다. 그 모든 걸 가능하게 하는 건 아무것도 아닌 일. 나를 먹이는 일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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