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비빌 언덕이다
"알밤아, 학교 가기 전에 벗어 놓은 옷 좀 정돈해."
"지금 주스 마시고 있잖아!"
날카로운 아이의 대답에 기분이 상한다.
"요즘 알밤이 대답에는 사랑이 빠진 것 같아."
"에?"
"엄마가 뭘 말해도 짜증 내고 귀찮아하잖아."
"응? 아닌데..."
그제야 딸은 나를 보며 무뚝뚝한 얼굴 근육을 풀고 살짝 웃는다.
"엄마를 사랑하는 건 알지. 그런데 네 말투는 엄마를 서운하게 해."
사춘기 남매의 감정 표현이 자유롭다. 나한테 짜증도 화도 팍팍 낸다. 가슴 빠져가며 젖 먹여 키워났더니 이럴 줄 몰랐다. 녀석들이 나를 무시하나 싶어 화가 치밀었다가 아이들한테 엄마는 비빌 언덕이라서 그런 거겠지, 잘 품어주자고 생각을 고쳐먹는다. 아이를 보면서 어릴 때 내가 떠오른다. 난 어릴 때 엄마한테 한 번도 화를 내보지 못했다. 사이가 안 좋았던 부모님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컸다. 엄마는 항상 화가 나 있는 듯 쌀쌀한 분위기를 풍겼다. 사춘기 때 엄마는 내 옆에 있지도 않았다. 자유롭게 감정을 내뱉는 아이들을 보면 다행이라 생각도 들고 부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다.
항상 이렇게 날이 서 있으면 힘들어서 못 키울 텐데 예쁠 때도 많다.
"엄마 냄새다. 우리 이불 냄새랑 비슷해."
빨래를 개다가 내 옷 냄새를 맡으며 좋아한다. 기분이 좋을 때는 갑자기 뒤에서 포옥 안기기도 한다.
-사랑해. 엄마한테서 태어나서 다행이야. 항상 고마워요~도덕 수업 활동으로 보내는 거지만 진심임-
사랑의 문자를 보내기도 한다.
"엄마 학교 수업 끝났어. 집에 가는 중"
밤톨군은 하교하고 집에 오면서 내게 전화를 해 집에 올 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엄마는 네가 학교 끝나고 엄마한테 전화하는 게 너무 좋더라"
"그래?"
알밤이는 한창 화장에 빠져있다. 어디 갔는지 안 보이면 화장대에 붙어 섀도를 바르고 상꺼풀을 세운다. 메이크업 영상을 보고 맨날 그려대니 화장술이 점점 늘고 있다.
나는 화장에 관심이 없다. 풀메는 할 줄 모르고 기초화장만 한다. 특히 눈화장을 못 한다.
다음 달에 중요한 행사 일정이 있는데 그때는 눈 화장을 하면 좋을 것 같다.
"알밤아, 나중에 엄마, 눈 화장 좀 해주라."
아이가 눈을 반짝인다.
"좋아. 엄마는 겨울 쿨톤 아이섀도부터 사."
"겨울 쿨톤 아이섀도가 있어?"
"아유, 검색해 봐. 엄마. 아, 그냥 내가 찾아줄게."
아, 갑자기 떠오른 단어. 핑프! 쉬운 정보를 스스로 알아보려 하지 않고 질문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뜻의 핑거 프린세스! 나 지금 핑프 한 거야?
나의 엄마,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젊을 때 엄마, 아빠는 뭐든지 나보다 많이 아는 모습으로 기억하는데
칠순, 팔순이 된 엄마, 아빠는 '아무것도 몰라요, 얘기해 줘도 이해 못 해요'하는 눈빛으로 눈을 끔뻑끔뻑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쉰 도 안 되었는데 벌써부터 요즘 유행은 난 모르오~하고 있으면 20~30년 후 내 모습은 어떨까. 엄마, 아빠 모습이 내 모습과 오버랩된다. 그건 싫은데. 그렇게 나이 먹고 싶지는 않다. 나이 들었다고 뒷방으로 물러나 자식에게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자식에게 부모의 자리, 누울 자리, 비빌 언덕으로 남고 싶다.
태어나서 혼자서 생존하지 못하는 유아기에는 엄마가 세상의 전부다.
꼬꼬마 시절엔 놀이친구다. 소꿉놀이 상대도 되어야 하고 놀이터에서 함께 술래잡기도 해야 한다.
사춘기가 되면 엄마 영역은 줄고 친구의 영역이 넓어진다. 혼자서는 못 해볼 모험을 친구와 함께 하면서 세계를 확장한다. 00역 나가서 놀고 맛있는 거 먹고 오기. 친구와 놀이공원도 다녀온다. 아이의 세계는 계속 커지고 엄마의 자리는 점점 작아진다. 엄마는 온 우주였다가, 친구였다가, 아이의 배경이 되어간다.
내게 젊었던 엄마는 애증의 대상이었지만 나는 내 아이들에게 마음껏 비빌 언덕이 되어주고 싶다. 무엇을 하든 응원하는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고 싶다. 그러자면 크고 넓어야 하는데 아직 내 언덕은 그다지 넓고 풍성한 것 같지 않다. 내가 못 누려본 것을 아이들이 당연한 듯 마구 달라고 하면 억울한 감정이 자꾸 밀려온다. 억울한 감정이 사라지려면 어린 나를 많이 사랑해줘야 한다. 사랑이 차고 넘쳐야 내면의 어린 내가 어두운 골방에서 나와 밝은 세계로 들어간다. 누가 나를 듬뿍 사랑해 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내가 나를 사랑해 주면 된다. 아주 많이, 자주자주 말하고 몸도 돌봐주고 위해주어야 한다. 그러면 품이 넉넉한 시원하고 넓은 언덕이 되지 않을까.
당신에게 엄마는 무엇인가?
당신은 어떤 엄마가 되어주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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